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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1장

37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38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39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41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42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43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44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45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46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47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48 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49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

50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51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52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53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54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의 식사자리에 초대를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손 씻지 않고 식사에 들어가십니다. 요즘은 손씻는 것이 위생적인 측면에서 필수적인 일이었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손을 씻는 것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정결예식'으로써의 손씻기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식사 전 손을 씻는 것 만으로도 그릇의 형태, 물의 양, 어느 손부터 씻는지, 손을 씻으며 외워야 하는 기도, 물의 상태, 손씻기 전의 손의 상태, 등에 대해 수 많은 정결 예식 규례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목숨과 같이 지키던 바리새인에게 이러한 정결 의식을 치르지 않는 예수님이 이상해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르셨을 리는 없을 것 같고 아마도 이 문제에 대해 짚고 넘어가기 위해 일부러 손을 씻지 않으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39절) 바로 겉과 속이 다른 모습에 대한 말씀입니다. 좀 뜬금 없는 것 같습니다만 예수님께서는 결국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해 손을 일부러 닦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도대체 손을 씻는 정결 예식과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요??? 말씀은 이어집니다.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40절)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41절).

겉과 속이 다르다는 말씀은 그 겉과 속을 만든 분이 하나님이시며 속(그 안)으로 '구제' 하는 것이 결국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하는 '정결예식'이라고 이야기를 전개하십니다. 즉, 손은 비유하신 '잔과 대접의 겉'과 같이 겉으로 보이는 부분을 의미합니다. 손을 씻는 정결예식에 집착하는 것은 오직 겉만 깨끗이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지적하는 부분은 왜 겉으로 보이는 부분에 집착하여 속을 놓치고(또는 무시하고) 있냐는 말씀입니다. 손을 씻는 정결 의식을 잘 지키는 것은 위생적으로나 경건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부분에서나 나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서 '속만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고 하지 않으셨음에 주의 해야 합니다.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40절)라고 말씀하심은 겉과 속이 모두 중요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오직 '그것만을 위한 그것', '손씻음을 위한 손씻음', '안식일을 위한 안식일'이 될 때는 큰 문제가 됩니다. 겉모습에 집착하여 '속'을 잊을 때, 완전히 그 의미와 마음이 하나님을 잊을 때, 그 것은 또 하나의 우상 숭배가 됩니다.

손씻음은 거룩함을 지키는 것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먹거나, 마시거나, 기도하거나, 성전에 갈 때에 손을 씻음은 거룩함을 지키는 것을 그 의미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룩함'은 남들에 비해 더 도덕적이고 더 윤리적이며 더 절제 하고, 더 청렴하고, 더 나아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을 성경사전에서 찾아보면 "성경 원문에서는 다양한 단어들이 사용되었는데, 그 기본 의미들은 ‘구별하다’, ‘분리(구분)하다’, ‘깨끗하게 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즉, 죄악과 부정으로부터 철저히 자신을 분리시키고, 오직 하나님의 소유로서 자신을 구별하여 드리는, 변화된 상태를 지칭한다.[네이버 지식백과] 거룩 [holiness] (라이프성경사전, 2006. 8. 15., 가스펠서브)" 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 소유로서 자신을 죄로부터 구별하여 깨끗하여 지고자 하는 마음이지 남들과 비교하여 우월한 무언가가 아닙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이 '거룩함'을 남들에 비해 더 거룩함, 더 깨끗함을 '드러내는 것'에 빠져들었습니다. 거룩함의 본래 의미는 점차 잊혀지고 단지 드러내는 행위인 '손씻기'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지적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에만 집중했던 마음을 하나님께로 되돌리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정말 '속', '마음'. '중심'이 정말 하나님께로 돌려졌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구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손을 백 번 씻는 것 보다 그 것이 너희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는 겉과 속(드러냄)에 관한 이야기와 구제(도움)가 연관되어 있는 또 다른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마태복음 6장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3-4절) 말씀입니다. 구제함과 드러내지 않게 함은 '하나님을 향함'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구제함은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고 드러내지 않게 함은 그것을 사람에게서 보상받으려고 하지 않고 보상하시고 갚아주실 하나님을 향하고 집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구별되고 깨끗하여지는 우리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갖추어야 할 '거룩'한 모습의 본질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향한 3번의 "화 있을진저"의 선언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십일조를 드리면서 그 안에 공의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음입니다. (하지만 다음 말씀에 그러려면 십일조도 드리지 마라..라는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않는 모습을 바라시고 계십니다.)

두 번째는 남들 위에 서고자 하는 마음을 꼬집으십니다.

세 번째는 평토장한 무덤 이야기 입니다. 유대인의 장례 풍습은 시신을 빨리 부패시켜 뼈를 모아 그 뼈를 조상의 뼈와 함께 합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시신을 빨리 부패시키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 땅에 묻는 것인데 이것은 뼈를 취하기 위함이지 최종 무덤이 아니기 때문에 그저 묻어놓은 곳을 표시만 하면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표시가 희미해져 사람들이 그 곳이 시신이 묻힌 곳인지 모르고 그 위를 밟는 일이 벌어지는데 그것은 시신을 접촉해서는 안되는 율법을 어기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즉,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만드는 족속이라는 선언입니다.

이 말에 자신들까지 모욕하는 것이냐며 항의하는 율법교사를 향해 다시 3번의 "화 있을진저"의 선언을 하십니다.

첫 번째는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본인들은 이 짐을 지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선지자의 무덤을 만들어 기념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자신도 들어가지 않을 뿐더러 남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다고 하십니다.

두 번째 선지자의 무덤을 만든다는 47절 말씀에는 해설이 48-51절까지 4절이나 붙어 있습니다. 죽여 놓고서는 기념을 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마태복음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하니” (마태복음 23장 29,30절) 라는 말에 더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선지자들을 죽인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며, 예수님은 그 피의 값을 이 세대가 감당해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미 그 결과를 알고 있는 저에게는 이 말씀들이 그들이 그들의 조상과 똑 같은 짓, 아니 더 귀한 분에게 더한 짓을 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들은 곧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적나라하게 저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읽으며 말씀을 나에게 적용하지 못하고 늘 ‘저노무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대체…’라며 혀를 끌끌 차며 읽고 있는 내 모습은 정확히 ‘만일 내가 저 시대에 있었더라면 저러진 않았을 텐데…’라고 말하고 있는 저 율법학자의 무덤세움과 다를 것이 없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속은 어떻든 겉으로 보이는 경건함과 거룩함 조차도 그리 매력적이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오히려 일탈을 하고 자유롭게 자기 소견대로 살아가는 것을 응원하고 열광하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늘 마음속 한 가운데에 남에게 더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고, 거룩하고, 종교적인 모습을 보이고 싶어하는 욕구는 계속 솟아오릅니다. 하나님을 핑계로 ‘나의 어떠함’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리고 기독교를 망쳐왔습니다. 이젠 아무도 더 이상 기독교를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41절)하는 종교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예수님을 핑계로 더 잘살고, 더 높이 올라가고, 더 영광을 얻기 위한 장사를 하는 종교로 생각합니다. 그 한 가운데 제가 있습니다. 말씀 묵상 하나도 이렇게 남들이 보는 블로그나 교회 홈페이지에 올리지 않고는 스스로 계속할 동력을 너무나 쉽게 잃어버립니다. 아무도 모르는 구제 따위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드리는 십일조 안에 공의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 따위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조차 높은 자리에 서고 문안을 받기를 기뻐합니다. 주식이나 집, 땅, 돈에 대한 열렬한 관심이 있음을 얕게 판 땅속에 묻어 숨기려 하지만 이는 숨겨지지 못하고 다른 지체들을 함께 걸려 넘어지게 합니다. 조금이라도 기도든, 말씀 읽기든, 묵상이든 한다 치면 스스로도 지기 힘들어 하는 짐을 남들에게 어떻게든 지우고 싶어 안달이 납니다. 너 왜 기도안해? 왜 성경 안읽어? 왜 묵상 안해? 말로 못해도 마음속으로 정죄의 칼날을 들이 댑니다.

그리스도인 조차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그저 사랑을 전하시고 사랑만 하시다 가신 것으로 착각 하는 경우가 많지만 예수님께서 적대감을 숨기지 않고 분노와 증오를 표현한 그룹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살인자도 아니고, 사기꾼도 아니고, 매국노도 아니고, 창녀도 아니고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돌아보면 나에게서 이 바리새인의 모습이 가득함에 섬뜩해집니다. 나의 한 자아는 다른 누구에게도 받을 수 있는 미움을 예수님께는 받고 싶지 않지만, 또 다른 자아는 사람들로부터의 사랑만을 바라며 예수님께서는 싫어하실 바리새인의 모습을 쫓습니다. 주여 나의 안에서 바리새인의 모습을 제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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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사진을 본문에 넣는 방법 file 2020.05.24 관리자
공지 [공지] 스마트폰>파일첨부 기능 추가되었습니다. [2] 2014.09.12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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