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나눔 20210224 매일성경 시편 46편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2021.02.24 00:53
시편 46편
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2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3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
4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5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6 뭇 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렸더니 그가 소리를 내시매 땅이 녹았도다
7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8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그가 땅을 황무지로 만드셨도다
9 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10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11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또한 반대로 고통을 회피하며 살아갑니다. 고통(그것이 육체적인 것이던 정신적인 것이던 간에)은 사람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쳐서, 사람마다 성향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할 수만 있다면 행복의 추구를 포기하고서라도 고통의 회피(부재)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것 같아 보이기까지 합니다. 저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고통은 그것이 실제로 도달하기도 전에 사람의 마음속에 ‘불안’과 ‘두려움’이란 환지통(phantom pain)을 심습니다. (두려움은 어떠한 대상에게 느끼는 감정이라고 한다면 불안은 대상의 부재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라고 심리학에서는 이야기 하기도 합니다) 때론 이 불안과 두려움의 고통이 실제 고통의 실체보다 더 커지는 경우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일단 큰 고통이 없는 삶에 안착한 자(그렇게 믿는 자)들은 안정을 꿈꿉니다. 아니, 현재 고통가운데 있다 할 지라도 그 고통이 더 커지는 것을 회피하는 마음으로라도 안정을 꿈꿉니다. 물론 현실에 대한 불만, 무료함과 단순함에 지친 삶에서 잠시 떠나 가끔 ‘일탈’을 꿈꾸는 때가 있을 수 있지만, 인간은 누구나 고통을 회피하길 원하고 그것을 떠올리게 하는 불안과 두려움을 일으키게 하는 상황을 만들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변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그 무엇인가에 기대려 합니다.
변하거나 움직이지 않는 것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바로 ‘땅’ 입니다. 사람들은 땅은 움직이고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기본 전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땅 위에 몇 십층이나 되는 건물들을 지어 올리는 것도, 두 다리로 아무 걱정 없이, 심지어 핸드폰을 보면서 걸어 다니는 것도, 자전거를 타고 넘어질 걱정 없이 자신 있게 핸들을 휙 꺾어 방향을 틀 수 있는 것도 모두 땅이 흔들리거나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평생에 걸친 굳은 확신이 있기에 가능한 것들입니다. 지진이란 자연 재해에서 실제 피해 보다 훨씬 더 사람들을 충격과 공포에 빠뜨리는 것은 ‘땅은 움직이지 않는다’라는 평생의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변하거나 움직이지 않고 나를 지켜줄 무언가를 사람들은 계속 찾아 다닙니다. 다이아몬드와 황금이 보석과 보물이 된 더 큰 중요한 이유는 반짝거림이 아니라 변하지 않거나 녹슬지 않는 성질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나라의 경제가 흔들릴 때에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을 것을 기대하며 달러를 삽니다. 달러가 흔들릴 때에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기를 기대하며 금을 삽니다. 다 필요 없고, 요동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다는 그 노무 ‘땅’, ‘땅, ‘땅’은 아브라함 시대때부터 지금 현재 한국 이 서울에서까지 식지 않는 인기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창세 때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어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에덴 동산’을 시작으로 인간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 믿어온 그 모든 선택지들은 인간을 배신해왔습니다. 변치 않는 유일한 피난처와 힘은 오직 하나님 뿐이시지만 그분은 창세 때부터 지금까지 그닥 크게 인기를 끄는 인간들의 선택지가 아닙니다. 심지어 본인이 그리스도인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조차 말입니다.
오늘 시편 46편의 시인은 변치 않는 피난처와 힘이신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간의 굳은 신념 중 하나인 ‘변하지 않는 땅’을 바다 속에 집어 넣는(2절) 극단적인 가정을 하면서까지 하나님의 변치 않으심(믿음직함)을 자랑하며 노래하고 있습니다. ‘땅’과는 달리 ‘바다’는 늘 변화하는 것이며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것이 넘쳐 늘 변치 않을 것이라 믿었던 ‘땅’ 덩어리인 산을 흔든다 할지라도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은(3절) 바로 변치 않는 피난처인 하나님 때문이라고 노래합니다.
과연 이 노래를 하는 시편기자는 정말 평생 이러한 불안과 두려움 없는 삶을 살았을까요??? 뭐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정말 그렇게 살았다면 하나님은 피난처와 힘이며 큰 도움이란 1절의 선언도, 땅을 바다에 처 넣고, 바다를 넘치게 하여 산을 흔드는 극단적인 가정도 필요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이 시를 지었고,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이 노래를 불렀을 것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시를 늘, 항상 노래하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 뿐이었을 것입니다.
믿음이란 것은 한 번 획득하고 마는 게임의 레벨과 같은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내려 놓고 하나님을 의지 했던 한 번의 경험이 있다 하여 내가 계속 앞으로 그런 삶을 계속 살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과거에 너무나 훌륭한 신앙과 믿음과 업적을 자랑하는 귀한 목사님들의 추한 말년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 같습니다. 늘 하나님이란 매력 없어 보이는 선택지를 내려놓고 당장 더 확실해 보이는 다른 무엇을 그 자리에 놓고 싶어 안달이 난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바로 내가 그 인간 입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늘 부르는 것입니다. 항상 쉬지않고 기억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이고 진정한 힘이라네.
내가 어떤 어려움 가운데 있을지라도
그는 만나주시고 큰 도움으로 이겨내게 하신다네
편평했던 땅이 솟아오르고 꺼져 내리고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져버린다 할지라도
거칠게 나를 흔들어 대던 바닷물이 더욱 뛰놀고
심지어 넘쳐서 저 산을 뒤흔들지라도
나는 두려워 하지 않으리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 41:10)
댓글 2
-
김용재
2021.02.24 08:42
-
김용재
2021.02.24 09:27
사실은... 이런 지식은 약간의 영어 실력과 구글 번역기를 사용해서 몇 십분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서 계속 반복하면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몇 십년 전과 비슷한 주장이 전혀 발전하지 않고 조국 교회에서 계속 자리를 차지 하고 있어서 놀라게 됩니다. 지난 번에 나누었던 "성격 결정론"에 의한 설명방법이 그런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 46편을 편집해서 전해 주려고 했던 분의 수고를 생각한다면, 그 시편을 지었다고 알려진 히스기야 왕의 감격과 분노와 눈물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잘못 아무렇게 해석할 수 없는데...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길 가에 떨어지면 사탄이 와서 말씀을 치워 버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하게 한다는 예수님의 예화가 갑자기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틀릴 수 있지만...
이 시편은 히스기야 왕이 열왕기 하 19편에 나오는 앗시리아의 침략을 받고 나라가 존망의 위협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완전한 도움을 받아 하룻밤에 18만5천명의 군대가 하나님의 천사로 전멸되는 기적을 체험한 다음에 앗수르 군대의 시체 사이를 지나가면서 예루살렘 바깥에서 지은 시라고 알고 있습니다
성경 구절마다 다르지만 이런 경우에 히스기야 왕이 어떤 기분으로 어떤 마음으로 이 시편을 지었는지를 상상하면서 시편을 읽으면, 몇 천년이 지났어도 히스기야 왕이 마음에 느꼈던 하나님을 같이 느낄 수 있습니다. 혹시 아실지 모르시겠지만, 독일의 한 성에 마르틴 루터가 감금되었을 때 이 시편을 읽고 큰 힘을 얻었다고 알려지고 있고 오늘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가사가 되었다고도 합니다
히스기야 왕은 당시에 최고의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왔던 산헤립에 맞서 하나님께 매달렸고, 응답을 받았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이 노래는 모세에게 대들었던 "고라"의 자손들이 불렀다고 나옵니다. 즉 그들의 먼 조상 고라는 죄를 지어 심판을 받았지만 그 자손은 살아 남아서 하나님을 섬기는 역할을 계속 담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그 시편에서 또 다르게 느낄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이 시편에서 하나님이 예루살렘에 거하셨기 때문에 이 싸움에서 이겼다고 이 시편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마찬가지 이유로 우리를 "내 안에 거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조국 교회에서 절대로 듣지 못하고 있는 신앙 체험을 히스기야 왕은 앗수르 군대의 시체 사이을 말 타고 지나가면서 이 시편에서 간증하고 있습니다. (조국 교회에서는 여간해서 이야기해 주지 않는 내용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차별하면 안 됩니다" "주식 투자하는 이방인과 같이 되면 안 됩니다" "자본주의 경쟁에서 상처 받은 영혼을 치료해야 합니다" "과외 공부 시키면 안 됩니다" 등등 근거를 알 수 없는 주장을 들어 본 적도 없고, 연관시켜 본 적도 없습니다. 바울은 이런 율법적인 요구에 대해서 고린도 후서 3:6에서 간단하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라고 요약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문자"란 문맥에서는 율법--무엇 무엇을 하라는 요구--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죽이고 예수님 안에 거하는 관계는 사람을 살립니다. 조국 교회에서 절대로 알려 주지 않는 비밀 아닌 비밀인데 히스기야 왕은 시편 46편에서 이 비밀을 노래 합니다
제가 틀릴 수 있지만... 모든 성경 읽기의 목표는 히스기야 왕이 그날 감격해서 느꼈던, 알게 되었던 하나님, 천사를 보내서 앗수르 군대를 멸망시켰던 예수님을 아는데 있습니다.(디모데후서 3:16) 그 예수님을 아는데 "차별하면 안 됩니다" "자본주의 경쟁에서 상처 받게 하면 안 됩니다" "미숙함이 여러분을 낙심시키지 않도록 마음을 잘 지켜라"와 같은 요구는 정말이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내가 상상했던 생각했던 이해했던 이 시편 내용을 나중에 히스기야 왕이 들었다면? 하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적어 보았습니다
그날 18만 5천의 앗수르 시체 속을 하루 종일 헤집고 다니면서 히스기야 왕은 흥분과 감격, 눈물, 하나님 사랑을 온몸에 느끼면서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무조건 용서 해 주는, 수 없이 반복해서 용서해 주시는 쓸개 빠진 "헷세드의 사랑"의 하나님이라고요? 원수를 사랑하라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루에 18만 5천의 목숨을 천사를 시켜 도륙내셨던 무서운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앗수르 같은 원수를 물리쳐 달라고 기도한 히스기야의 분노가 맞았습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그 분노에 찬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왼쪽 뺨을 맞으면 오른쪽 뺨을 내밀라고요? 시편 46편을 읽어 보면서 그 말의 진정한 의미와 적용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