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사용하고 계신 브라우저는 오래되었습니다.
알려진 보안 취약점이 존재하며, 새로운 웹사이트가 깨져 보일 수도 있습니다.
최신 브라우저로 업데이트 하세요!
오늘 하루 이 창을 열지 않음
남서울 톡톡

누가복음 11장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54.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55.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56.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57.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58.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 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 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59. 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쉽게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화평케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예언한 것이 분명한 이사야 9장 6절 말씀은 그를 "평강의 왕"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하지만 '평강의 왕'이란 유명한 예수님의 별명은, 성경에는 여기에 밖에 나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으로 설명하는데 그 곳에서 멜기세덱을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히브리서 7장 2절)이라고 설명하고 있기는 합니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우리의 화평'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에베소서 2장 14-15절)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화평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사도행전 10장 36절)

하지만 예수님께서 "나는 화평을 주러 세상에 왔노라"라고 직접 말씀하신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왠지 있음직한데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충격적이지만 예수님께서 그것과 정 반대의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51절) 헉... 이 내용은 읽을 때 마다 그냥 넘기고 싶은 말씀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고 싶지도 않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서 말입니다. 그래서 늘 낯설게 느껴지는 본문입니다. 오늘은 그 뜻을 알고 싶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 바르게 깨닫도록 도와주세요-

잠깐 화평과 분쟁에 대한 이야기를 멈추고 오늘 본문의 처음(49절)으로 돌아가면, 예수님께서는 땅에 불을 던지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불은 성경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고, 또한 해석될 수 있는데 여기서 정확히 어떠한 의미로 쓰였는지는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습니다. 전통적인 ‘불’의 이미지는 '심판'의 이미지 입니다. 사실 '심판'으로 해석한다고 해도 틀린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이 땅을 구원하러 오셨지만 역시 심판하러 오셨고 또 오실 것입니다. 심판은 이미 시작되었고 완성되어 나갈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좀더 긍정적인 이미지로는 '복음' '생명' '사랑' '진리' 등으로 해석해 보더라도 역시 틀린 이야기가 아닌 것 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이러한 '불'을 일으키셨고, 역사적으로도 증명 되었듯이 이 불길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또한 성경에서 많이 쓰이고 있는 불의 이미지로서 '성령'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던지신 성령의 불은 이 땅에서 놀랍게 타올랐고 앞으로도 타오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불'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아니면 위에 설명한 모든 의미를 다 담고 있는 말씀이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을 던지러 오신 그 목적을 위해 받아야 할 세례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고 계십니다.(50절) 그 세례는 다른 해석의 여지 없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의미한다고 보여집니다.

백과사전을 보면 '불'은 산소와 물질이 화합하여 ‘연소’하는 현상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연소'에는 3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첫 번째 요소는 연료(타는 물질)이고 두 번째 요소는 발화점 이상의 온도이며 마지막으로 일정량 이상의 산소가 있어야만 연소가 일어납니다.[네이버 지식백과] 연소 [combustion, 燃燒] (두산백과)

예수님께서 던지신 불 역시 타는 물질이 필요할 것입니다. 또한 이 물질에 불이 붙기 위해서는 발화점 이상의 온도가 필요한데, 예수님께서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49절)라고 하신 말씀이 제겐 이 '발화점' 이상의 온도라는 조건을 갖추었다면 더 이상 원할 것이 없다라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발화점 이상의 온도가 되는 데에 바로 세례(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이 있어야 하는데 그 것이 이루어 질 예비된 날을 예수님께서는 답답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던지신 ‘불’은 연료(타는 물질)인 그 누군가에 옮겨 붙어 타오릅니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불이란 것은 원래 태워서 없애고, 주변으로 번져 나가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 불이 붙은 그 누군가는 자신을 태워 없애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나야 합니다. 늘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고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었던 나, 나, 나. 어쩌면 우상으로 섬기고 있던 그 나 자신을 태워 없애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통해 불은 빛과 열을 내며 타오릅니다. 그리고 그 불길은 주변의 누군가를 다시 뜨겁게 만들고 결국 그 불은 번져 나갑니다.

발화점에 가까운 온도에도 자신을 사르지 않으려 버티는 저항은 있게 마련입니다. 냉랭한 마음과 냉소적인 태도들은 불이 자신에게 번져오는 것에 저항합니다. 그리고 치열하게 싸웁니다. 이 치열함은 마치 전쟁과 같습니다. 저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51절)라는, 예수님께서 직접 말하신 이 충격적인 말은, 이 불이 번져가는 그 경계에서 치열하게 벌어지는 이 '전쟁'을 묘사한 말씀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수의 불로 타오르는 자와 그것을 저항하고, 싫어하는 냉랭한 자 사이에 벌어지는 전쟁의 전선(戰線)은 어디든 그어질 수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 곳이 한 가정 안이라고 할 지라도 말입니다. 한 가정 안에서도 불이 붙은 세 사람과 냉랭한 두 사람, 불이 붙은 두 사람과 냉랭한 세 사람 사이에 이 치열한 전쟁은 벌어지게 됩니다. 그 것이 비록 아버지가 아들, 아들과 아버지와, 어머니와 딸과, 딸과 어머니와, 시어머니와 며느리와, 며느리와 시어머니라도 말입니다.(53절)

이미 우리는 세상에서 이것과 유사한, 가족마저도 산산히 깨뜨리고 분열시키는 전선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바로 '이념'과 '이단'에서 말입니다.(정갑신 목사님의 설교영상20200222 emb 마지막 때를 위한 준비 누가복음 12장49~59 참고) 이념과 이단이 만드는 경계선에서는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심지어 가족 안에서도 싸우고, 분열하고, 다투고, 죽이고, 고발하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분쟁의 현상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던져 주신 불에 의한 분쟁과 이 '이념'과 '이단'이 벌이는 분쟁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싸움의 방법입니다. '이념'과 '이단'의 싸움은 칼로 상대를 베는 싸움이지만 위에서 말했듯 예수님께서 던져 주신 불에 의한 분쟁은 십자가로 자신을 못박는 싸움입니다. 자신을 태우는 불입니다. 이념과 이단은 원수를 원수로 복수에 복수라는 영원한 죽음을 향하지만 예수님께서 던져 주신 불은 자신을 못박음으로 전쟁을 끝내고 그 생명의 불을 옆 사람에게 번지게 합니다.

한국 기독교가 이 세상 속에서 끝없는 싸움과 비난의 한 가운데에 있는 것은 자신을 못박음으로 전쟁을 끝내는 불이 아니라 바로 '이단'과 '이념'의 방법으로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감히 우리를 건드려? 우리 세를 보여줘!! 라고 달려드는 방식은 예수님께서 싸우시는 방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태워 없애시고 주변 사람에게 그 불이 옮겨 붙게 하시는 싸움의 방식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인 우리는 그러한 싸움의 방식을 택해야 합니다.

말이 좋지 너무나 하기 싫은 일입니다. 지는 것은 물론이고 '나'를 태워 없애는 것은 더더욱 하기 싫은 일입니다. '나'를, '나의 가족'을, '내가 사랑하는 것'을 공격하는 것은 그 무엇이든 끝까지 응징하고 배를 더해 갚아주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입니다. 사실 그렇게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불타고 있지 않으니, 내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서 불이 붙을 만한 발화점 이상의 뜨거운 온도는 커녕 온기조차 느끼지 못합니다. 불이 일어나지 않으니 전쟁이 일어나는 치열한 전선조차 없습니다. 단지 '이단'과 '이념'에서 보이는 바로 그 개싸움만이 내 가족 안에서, 내 주변에서, 내 교회와 세상속에서 일어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나에게 외식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이 시대를 분간하라고 하십니다.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않느냐고 반문하십니다.(56-57절) 마지막 비유 역시 이해가 쉽지 않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신 오늘의 본문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준비하라!"라는 종말을 준비하라 하신 것에 이어서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종말’에 일어날 최후의 심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승천하여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그날을 묘사하고 계신 것일 것입니다. 그 날에 법관이신 그 분 앞에 서게 되기 전에 ‘화해’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저 예수님께서 이 땅에 던져 주신 그 불에 자신을 불살라,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고, 제자의 삶을 살기를 결국 거부한 냉랭한 사람들과 함께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까지 나오지 못하는 옥에 갇히는 날이 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이름
공지 사진을 본문에 넣는 방법 file 2020.05.24 관리자
공지 [공지] 스마트폰>파일첨부 기능 추가되었습니다. [2] 2014.09.12 관리자
공지 광고글, 광고성(교회포함) 글, 비방글, 게시판 성격에 맞지 않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사전 통보 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2014.07.18 관리자
1475 누가12장 베드로의 질문에 주목해 보았습니다 [2] 2021.02.13 김용재
1474 자본주의 경쟁에서 상처 받은 분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까요? 2021.02.12 김용재
1473 헤세드의 사랑이란? -- 나는 세상에 싸움 붙이러 왔다 2021.02.11 김용재
» 20210210 누가복음 11장 49-59절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2] 2021.02.10 안봉균
1471 토요 기도회:사 27장1~13절 2021.02.06 김오진
1470 20210206 누가복음 11장 37-54절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2] 2021.02.06 안봉균
1469 사랑 2021.02.05 안예준
1468 20210205 매일성경 누가복음 11장 27-36절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1] 2021.02.05 안봉균
1467 20210202 매일성경 누가복음 10장 25-42절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1] 2021.02.02 안봉균
1466 20210201 매일성경 누가복음 10장 17-24절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1] 2021.02.01 안봉균
1465 누가복음 9장 --이런! 예수님도 짜증 내셨네요! 2021.01.31 김용재
1464 독생자 [2] 2021.01.31 안예준
1463 20210129 매일성경 누가복음 9장 51-62절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 2021.01.29 안봉균
1462 누가복음 9장 -- 십자가 지기를 거부했던 유다 2021.01.29 김용재
1461 누가복음 9장 -- 십자가를 지고 가라는 진짜 의미 2021.01.29 김용재
1460 누가복음 9장 -- 조국 교회가 알려주지 않는 예수님 2021.01.29 김용재
1459 20210128 매일성경 누가복음 9장 37-50절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 2021.01.29 안봉균
1458 20210128 매일성경 누가복음 9장 28-36절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2021.01.29 안봉균
1457 20210127 매일성경 누가복음 9장 18-27절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2021.01.27 안봉균
1456 누가복음 9장 --너희 행위부터 살펴본 후에 남을 비판하여라 2021.01.26 김용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