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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서울 톡톡

위선(僞善)으로 고백한 사랑은 비 신앙인의 소치(所致)

 

이 글은 No 866번의 연장선상에서 쓰는 내용이다.

수강이 끝나면 남대문 시장에서 양말을 파는 일이 일과였다. 계속 사고 파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상상의 나래를 타는 시간이 많았다. 여고 2년생 그 어린것이 일찍 문학소녀가 된 탓에 그렇게 날더러 오빠가 되어 달라고 중매까지 세워서 졸라댔고, 그 집을 마지막 떠나오던 날 두 권의 책을 나에게 선물해줬다.

 

점원 생활과 학교생활에 쫓겨 소설 한 권도 읽지 못한 내가 신 은정으로 부터 받은 김소월의 진달래꽃과』 『폭풍의 언덕을 기차에서부터 다 읽어봤다. 그 걸 한 문학의 차원에서 이해하지 않고, 연정의 글로만 알고 그 책을 그의 기숙사로 반송을 해서 어린 소녀가 사감선생에게 불려가 꾸중을 듣게 한 내가 얼마나 어리석고 못할 짓을 했는가!? ‘은정은 얼마나 울었을까! 우현이란 인간이 얼마나 미웠을까!’ 그 생각에 사로잡혀 세상만사가 귀찮아졌다. 매년 겨울방학이면 귀가하여 상점에 있는 큰 화로 가에 마주 앉아서 대학가면 전공은 무엇을 할 거야?‘ 묻기에 나는 생각 없이 철학이라고 하니까 피시 반갑지 않는 태도였다 그 집에서의 생활이 주마등처럼 떠올라 고민의 늪으로 점점 빠져갔다.

 

애이 희생하자! 될 대로 되자! 자포자기 끝에 백지위에 펜을 들었다. 스무 살짜리 고3 학생에게 일곱 살이나 많은 총각이 사랑이란 단어를 쓰려니 너무도 쑥스러웠다. 애교도 별로 없고 체구도 작은데다가 그의 아버지가 나의 스폰서가 되어 나를 목사로 키워주겠다는 약속만 어기지 안았더라면이라는 어휘가 머리를 꽉 채워 사랑이라는 뜻풀이가 생각이 안 났다. 그러나 우선 마음의 괴로움을 면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격식부터 어른대우를 해서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은정 씨, 그간 얼마나 괴로웟지요?. 이 숙맥이가 은정의 인격에 먹칠을 당하게 한 나 장본인이기에 벌을 받아야 마땅하겠지요. 내가 너무 어리석었어요. 이제 나도 인생의 갈 길을 결정했어요. 은정 씨, 사랑합니다. 장래를 약속하는 겁니다. 사랑이란 주머니는 텅텅 비여 있으면서도 5년지기 연인처럼 편지를 써 보낸 것이다. 성경 출애굽기 20장 십계명 중 9번 째에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랄라.’라는 율법이 살아있다. 하물며 신학도가 위선적으로 사랑을 고백한다는 것은 비 신앙적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랑하는 은정아, 내가 원하는 대로 네 오빠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이제부터 이성은 너밖에 생각 안하기로 약속 하마이렇게 썼으면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갑자기 격을 높여 받는 게 얼마나 부자연스럽게 느껴졌을까.!

이어 답장이 왔다. 재번하고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저같이 쓸모없는 여자를 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사랑을 하다니요. 나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죽어버리고 싶습니다. 정말 죽고 싶습니다.”라는 내용이 실려 왔다. 그 편지를 보고, 나는 나대로 왜 이렇게 마음이 변한 것일까 어떤 점이 싫다는 말도 없이 자포자기식으로 나열을 했을까. 그렇게 하는 것이 소위 반어법(反語法/문장의 뜻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법)이다 그걸 몰랐던 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책을 돌려받았을 때 너무 상처를 받아서 그런가보다 생각하고 나도 더 이상은 그 문제를 잊기로 했다. 내가 1999녀에 한국 유일의 월간 수필문학에, 2003년 하국소설가협회에 등단한 후에야 반어법을 알게 되었으니 신 은정과 나의 인연은 그 반어법의 문장 때문에 무산된 것이나 다름없다.

 

아버님이 작고하셨다는 전보를 받았다. 집에 가보니 이미 숙부님들이 장례를 다 치룬 다음에야 배달사고로 전보가 늦게 도착하여 뗏장이 덮인 묘만 성묘하고 순천 자애원 사무실에 들렀는데 휴가 갈 때마다 인사정도 하던 노 정애라는 서무직원이 위로하면서 부대 소속을 좀 가르쳐줄 수 없습니까? 요청하기에 무심결에 소속을 적어주었다. 그는 영광에서 살면서 중학교 2학년 때 일곱 식구중 혼자남고 남은 가족은 인민군에게 몰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바 있다.

 

귀대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교제를 꿈꾸는 편지가 왔다. 오는 편지마다 답장은하면서도 묻는 말에 구체적인 대답은 생략했다. 곁에서 지켜보는 박 총무가 얌전한 직원이라고 소개를 하며 결혼상대자로 사귀라는 것이다. 노 정애라는 직원이 내 편지를 받은 날에 특히 거의 멍한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나는 그 직원에게 수저 하나값도 없는 가난뱅이이고 시부모도 없는 고아로 자랐다는 점을 몇 번이고 주지시켰는데 나도 마찬가지입니다라는 답으로 인연을 맺는 일을 포기하지 말자고 졸라댔다. 순천에 갔을 때 신 은정은 되돌려 받았던 두 가지 책을 나에게 다시 주면서 감정도 온화해졌음을 감지했다.

 

얼마 후에 결혼문제를 매듭짓기 위해서 휴가를 갔다. 그날 밤에 그 원의 문 귀선 선생이 나를 붙잡고 밖으로 나가자고 몰아세웠다. 나는 그 여자가 내 여자였으면 싶게 늘 애교 떠는 여자였다. 얼마쯤 가다가 오 선생님, 여기서 100미터 지점인 동천의 둔치에 가면 노 정애 선생이 오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어서 그곳으로 가보세요. 라며 자기는 시베리아바람처럼 사라져갔다. 아니나 다를까 늘 애수의 모습으로 인사하던 노 정애 선생이 다가와 팔짱을 끼고 걷기 시작 했다. 자기는 그의 외가에 결혼을 한다고 이야기를 이미 했다는 것이다.

 

둔치를 넘어가니까 두 사람이 앉을 만한 잔디밭이 있고 억새가 우리를 가려주고. 교교한 달빛이 우리의 동작을 촬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성(異性) 이 마주 앉았는데 이성(理性)적일뿐 이성(異性)의 감정 따위는 전혀 없었다. 두 사람은 악수를 한 채 교대로 기도를 했다.“하나임 아버지, 이 고아 두 사람을 고히 길러주셔서 이제 성년이 되었습니다. 금년 1114일에 결혼을 하겠습니다. 우리가 가정을 이룸으로 이 사회와 국가에 이바지하는 가정, 교회를 부흥시키는 가정이 되게 인도 하여주십시오. 건강도 지켜주시고 출생하는 후세들에게도 복을 내려주십시오. 모쪼록 우리 두 사람의 가정이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을 돌리는 가정되게 하옵소서.

 

세상에 이런 약혼도 있을까 이 약혼이 유일하고 질서 있는 약혼이라고 자부한다. 우리 약혼의 인정은 누가 해주는 것일까. 당연히 하나님이시지. 그 이상의 확실한 보증이 또 어디 있을까. 약혼반지도 없지만 마음에 평생각오의 반지를 새겼다. 전혀 감정동요를 느끼지 않았다. 포옹도 하지 않았다 키스도 하지 않았다. 키스 한 번 정도는 해서 진한사랑이라는 것을 남기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결혼 후에야 자연스럽게 정열적인 부부임을 깨달았다.

 

그 다음날, 신 은정 부모 측에서 교제를 허락할 터이니 생각해보라고 권고가 들어왔다. 그것은 아버님이 작고하시므로 오우현은 아무것도 문제 될 것이 없는 총각이었기 때문이다. 데릴사위를 해도 7년을 부모형제처럼 사귀고 신앙과 인품, 인물을 나무랄 데가 없는 데 굳이 놓칠 리가 없었을 것이다. 625당시 가족이 다 피란 중이었지만 그 크나큰 상점의 살림을 도맡아 깊은 산속으로 옮겼다가 실지회복이 된 후 상점을 다시 회복시키는데 절대적 역할을 생각하면 상속자의 자리를 주어도 아깝지 않은 확실한 신앙의 청지기가 아이었던가.

 

그때의 나의 상황은 기로에 서서 생각을 안 해볼 수가 없었다. 부자 집 사위자리를 갈 것인가. 고아로 자라 땡전 한 푼도 없는 노 정애와의 약혼의 언약을 지킬 것인가. 그보다 먼저 노 정애와 하나님 앞에서 약혼을 해버린 처지인데 신의(信義)를 지키는 것만이 믿음의 지킴이었다. 신 은정이 반어법을 안 썼든지 내가 노 정애와 약혼 전에 반어법을 알고 있었다면 신은정과 나는 인연이 되었을 것임이 분명했다. 결혼 후 두가정의 어느 쪽이 더 행복할지는 논외로 하고라도.... 나는 중간자 역할을 하는 박 총무에게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어제 약혼을 했소,’ 라고 대답하자 너무 비싸게 굴지 마라면서 실망스런 표정이 역력했다. 그런 정황에 부자 집으로 선택한다는 것은 세상적인 가치관에도 못 미치는 처사이거늘 하물며 15세부터 믿음의 가치관으로만이 똘똘 뭉쳐온 내가 신의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그 반어법 이해부족으로 기로의 방향결정에 시간차이가 생겨 영영 신은정과의 꿈을 포기한 나는 소천한지 15 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신 은정에게 미안한 마음을 떨치지 못하고 호흡한다. 신 은정과의 사연을 주제로 논픽션을, 혹은 수필을 써서 발표도 몇 번했다. 그는 부군을 따라 서울에서 살게 되어 가끔 만나면 은정에게서는 얄미운 정이 묻어나오고 나에게서는 미안한 감정 에 얽매여 사과할 기회만 찾느라 애쓰면서도 소통은 원할 했다. 그의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그도 내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하면서 옛이야기로 소통을 했다. 어느 날, 갑자기 그가 간암으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죽기 전에 사과 한마디는 꼭 하기로 작정하고 갔으나 사투를 하는 자 앞에서 차마 사과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어서 그냥 돌아섰고 그는 하늘나라로 갔다. 7,8년 후 그의 성묘를 하려고 찾았으나 묘를 잦을 수가 없어서 작년에야 목사인 그 아들과 안산 일우에 평장된 신 은정의 묘 앞에서 그 어머니와의 사연을 쓴 논픽션을 주면서 엄마에게 해야 할 사과를 아들에게 했다.

 

해병근무 약 1년을 앞두고 나는 결혼하기 위하여 휴가를 나왔다. 누구에게 신부 사진을 보일 사람도 마땅치 않아 외할머니에게 사진을 드리면서 할머니, 저 이 처녀와 결혼 차 휴가 왔어요.‘라면서 외할머니의 반응을 기다리는데 아가시 괜찮다. 하시기에 여려가지 근황을 이야기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너무 무모한 결혼을 한 것이다. 부모도 없고 결혼비용도 요새로 말하면 양복 한 벌 값도 없을 뿐 아니라 신혼신부가 거처할 방준비도 할 수 없었는데....지금 생각 같아선 총각신세로 죽을망정 도저히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결혼할 수 있도록 내 머리 속에서 사색(思索)덩어리를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몽땅 지워버린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결혼을 앞두고 외조모님과 이모님이 합작으로 양복 한 벌을 가져오셨다. 친구는 중절모자를 빌려주었다. 50리길을 버스로 갔다. 영광읍교회에 도착해보니 누가 했는지 식장에 꾸밀 것은 다 꾸민 것 같다. 주례목사는 내가 잘 아는 김 정기목사였고 들러리는 내가 아는 성가대 지휘자였다. 어느 집 아이인지 꽃을 뿌리면서 입장하는 꼬마도 동원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 결혼을 위해서 영광읍교회와 처외가 여러분이 동원되었는데 답례라던가 신세진 분들에게 인사치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 만치 무일푼이기도 했지만 그런 생각조차 안 했던 것이다. 몇 년 전에 주례목사 사모님을 찾았지만 이미 소천하시고 안 계셨다. 하객을 맞이하는 것도 역시 노 정애 권사 외가에서 하게 되었다. 그런 주재에 격식을 찾아 신랑다루기를 당했다.

 

다음날, 광주 처외삼촌 댁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나의 큰아버님 댁에서 너무 서운 했던지 잠깐 들려 약식 차례 상을 차려 요구를 하게 해주었다. 동네 초등학교 동창들로부터 모아온 쌀을 보여주며 이게 네 결혼에 대한 부조(扶助)라고 해서 받았노라고 큰아버님이 말씀 하셨다. 광주고속버스회사의 용도과장으로 있는 처 외삼촌이 승용차 세대를 동원하여 결혼 다음날은 결혼행진을 하는 기분이 생기려고 했다. 그 외삼촌 집에서 3일 정도 지나면서 장인장모도 없어 처 외숙모로부터 오서방이란 칭호를 받으니 이상한 기분이 생기면서 감사하기도 했다.

 

다 찌그러지는 천정이 닿는 초막집, 작은 아버님 부엌방에서 이틀 밤을 지난 다음날, 순천시 자애원장으로부터 총무 직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 들어와 일단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신혼부부가 250명 정도 수용된 고아원 총무로 부임하는데 수저 저붐 하나도 없는 빈 몸으로 가게 되다니! 다행스럽게도 비여 있는 일본 식 사택이 있어서 그곳으로 들어갔다. 이미 그곳에 있는 살림기구로 첫 살림을 시작하였다. 노 정애 권사가 고교시절 방학 때면 그곳에 가서 자원봉사하면서 익혀진 원감님이 친정어머니처럼 대해주어서 가정생활 출발이 편했다.

 

원아들이 사는 건물은 엉망이었다. 환경과 건물을 보니 원장의 사회사업정신을 알 수 있었다. 고아원 자산으로 주위에 상당한 넓은 밭이 있고, 논도 조금 있는데 그게 고아원 명의로 있는 게 아니라 원장 개인 앞으로 소유권이전이 되어 있었다. 세법을 모르는 것은 고사하고 양심 문제였다. 그런데도 원장은 면세 신청을 하란다. 휴전협정이 조인된 후, 1950년대 모든 고아원들의 수입원은 선명회라는 기구에서 전쟁고아로 미국에 등록된 원아들 숫자대로 매월 보조금을 수령하였고, 의류와 식료품이나 학용품들이 적잖게 나왔다. 또 기독교 봉사회라는 기구가 미국에 있어 매월 밀가루 등 보조 식품들이 나왔다. 생계 수단금액을 수령해서 고아원의 회계부에 맡겨 지출되는 것이 아니라 원장이 어느 곳에 쓰는지 모르겠으나 원에서는 모든 생활품을 외상으로 여기저기서 갔다 쓰고 매월 말에 빚 갚는 일로 소일을 했다.

 

또 도청에서 수용인원수에 따라 매월 부식비가 나왔다. 그런데도 항상 부족하여 애들은 배가 고픈 형편이었다. 한 번은 기독교 봉사회에서 밀가루가 배당이 되어 그 전표를 가지고 광주의 창고에 가서 밀가루를 타가지고 다른 곳에 가서 매도하여 쌀로 바꾸려고 현찰을 가지고 그냥 들어왔다. 애들이 잡곡밥이나 밀가루만 먹는 것이 실증 났기에 언제나 그런 패턴으로 쌀 섞은 밥을 먹일 수 있었다. 그런데 기자들이 내 뒤를 밟아가면서 밀가루 매도하는 것을 알아내 가지고 와서 총무가 부정을 했다고 트집을 잡는 것이다. 원감이 총무를 믿어주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딱 오해받기에 알맞았다. 아마도 그 문제를 원감이 봉투로 해결한 걸로 알고 있다.

 

그 원에는 중고등학생들이 반 이상이 되어 왈가닥들이 많았다. 밭이 있기 때문에 작업하는 일이 더러 있는데 애들을 복종시키기에 역부족했다 어느 날, 밤은 해병의 기질을 발휘하여 중고등학교 원아들을 엎드려뻗쳐 기압을 실시한 일이 있는데 그 일이 오히려 애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즉 사랑이 부족한 총무라는 인식을 받게 되었다. 어느 원의 총무 말을 듣고 한 아이를 정보원 노릇하도록 밀약을 한 일이 있는데 그 아동이 그 일을 퍼뜨려 오히려 곤란하게 만들었다. 건물의 창고가 너무 허술하여 가끔 쌀 도둑을 맞는 일이 잦았다. 매일 밤 예배를 드리는데 그런 일이 생긴 날 밤에 누구든지 쌀 훔쳐낸 자가 자진해서 고백하면 용서하고 죄를 묻지 않겠다고 설득했으나 무거운 침묵만 흐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교육의 책임자가 책임을 져야지, 라고 말하며 가느다란 대막대기를 갖다놓고 누구든지 나와서 내 다리를 치라고 명하였다. 분위기는 더 무거워졌다. 아무도 안 나오면 내가 칠 수밖에.... 나는 내 다리에서 피가 줄줄 나도록 직접 다리를 쳐댔다. 모두가 울기 시작했다. 몇 아이가 나와서 엎드려 빌었다.

 

그 고아원은 고 나 봉례 원감이 아니면 운영되기 힘들 정도였다. 그분은 젊어 일직이 혼자 되셔서 자기 제낭이 운영하는 고아원에 원감의 책임을 맡은 후부터 그 원의 어머니 역할을 했다. 정말로 희생정신 예수님의 정신으로 사시는 분이셨다. 기도로 일관된 생활을 하셔서 믿음의 어머니라고도 불렀고 사랑의 정신을 빼놓으면 아무것도 없는 분이셨다. 우리 딸의 출산도 그분이 처의 친정어머니처럼 받아내시고 6개월을 그곳에서 자라나게 해주셨다. 남편 없는데도 그분 때문에 처가 첫아이를 수월하게 길렀다.

 

나는 총무로 부임했던 그해 말에 그 원을 사임하기로 결심했다 일자리가 있어서도 아니고 고아사업의 정신이 원장과 맞지를 않아 더 있을 수가 없었다. 원감이나 직원들이 내가 사임하는 것을 말리다가 안 되니까 원장에게 이야기가 되었다. 아무 준비도 없이 떠나려는 나의 뜻이 사회사업의 모순에 짜증을 느껴 서임을 원장은 짐작했을 것이다. 원장역시 사임을 만류하면서 정 떠나려면 방한 칸이라도 얻을 준비가 된 후에 떠나게라고 하잖은가. 또 정말 가려면 혼자 가지 말고 자네 처와 같이 떠나게 그 윽박지름에 할 수 없이 기약 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얼마 안가서 516 혁명이 일어나고 국회가 해산 당했다가 혁명정부의 주도하에 새 국회의원선거 공고가 나왔다. 그 때 원장은 대중당 배경으로 국회의원에 출마준비를 하고 있었다. 직원들 모두가 원장이 국회의원에 당선이 되어도 또는 안 되어도 그 고아원은 이전보다 타격이 심할 것이라고 걱정이 태산 같았다. 나는 직원회를 소집하여 원장이 국회의원 출마를 하면 전원 사임하기로 결의하고 연판장에 사인을 받았다. 그 걸 들고 원장에게 출마포기를 권하며 연판장을 전달했다. 결국 출마포기를 하고 말았다. 얼마나 고아들을 위해서 쾌거의 일인가!

 

국회가 해산되고 혁명정부가 들어서자 너도나도 모든 단체들이 데모를 하기 시작했다. 그 바람이 내가 있는 고아원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어느 아침 눈을 비비고 밖에 나가보니 건물의 벽이고 기둥 할 것 없이 총무이하 모든 직원 총사퇴하라는 포스터가 부착되었다.. 드디어 내가 나갈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처에게 나 혼자만이라도 서울 갈 봇짐을 간단히 싸라고 했다. 무슨 일인지 막상 떠나려고 하니까 고등학교 2,3학년 대표들이 자기들이 잘 못했으니 사퇴번의를 해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내가 이때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주님의 사랑을 못주는 원장과 고아사업을 같이 할 수가 없어 떠나야만 했다. 내가 서울에 가서 방이라도 얻게 되면 그때 모녀를 데려갈 터이니 그때까지만 좀 봐달라고 원감님께 부탁하고 나는 서울을 향하여 순천역으로 발길을 재촉 했다.나와 차츰 멀어지는 처는 아이를 업은 채 눈물을 닦아내는 모습이 아련하게 보였다. 어떤 가난과 고난의 상황에도 고고(孤高)한 믿음의 괴도를 걷게 하신 우리 하나님께 오늘도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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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사진을 본문에 넣는 방법 file 2020.05.24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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