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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서울 톡톡

남서울 교회 발전의 이모저모

 

남서울교회는 안디옥교회, 하나님 자녀의 신분을 지닌 남서울 공동체가 걸어온 이모저모를 모른다면 안디옥 교회와 (雙璧)벽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우리 교회가 현대적 안디옥 교회가 되여 하나님께 영광이요, 세계를 품고 이웃을 섬기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 나의 일상이다..

 

세상 단체이든 교회의 공동체 역시 제일 중요한 것은 첫째가 순수한 말씀과 신앙적 덕망을 지닌 담임목사님을 청빙하는 것이다. 홍 정길 목사가 문화촌교회 협동목사로 목회하던 중 한강중앙교회 부흥강사로 초청받아 집회하던 중 나도 하루 밤 그 예배에 참석하여 저녁집회가 끝난 다음 여담 석에 동석하게 되었다. 홍 정길 목사의 얼굴에 은혜와 자신이 충만해 보였다. 그 당시에 부흥회 기간이 거의 토요일까지 6일간인데 홍 목사는 다음 주일날 대예배까지 설교한다는 말을 들었다. 전무후무한 장기간의 부흥회였다. 중앙교회 교인들이 그 강사에게 홀랑 반해버린 것이다. 그때 고 남 준우 장로님과 박 정순 권사, 손 옥자 권사가 그 교회를 섬기고 있을 때였다.

 

그 집회가 끝난 다음 그 세분과 반포지역에서 네 분이 합세하여 남 준우 장로님 댁에서 남서울교회 개척예배를 드렸다. 하나님은 남서울교회를 그렇게 세우셨다. 그 당시는 대개 나이 드신 목사들이 권의주의로 목회를 하는가 하면 양떼를 지키는 목자라기보다는 믿음의 아버지로 대우받기를 당연시했다. 대개의 교회에서 매주 한 번씩 구역성경공부를 하는데 구역장은 일방적 설교를 했고, 말씀을 삶에 적용시키는 것보다는 일종의 모임에 지나지 않았다. CCC 총재인 김준곤 목사의 사역을 맡아서 일했던 30대 초반의 홍 정길 목사가 남서울교회에서 새바람을 일으켰다. 성경 대학을 개강하여 말씀중심으로 사는 방법을 적용 시키고, 구역모임 하루 전에 구역장 예비공부를 시켜서 구역원들이 그 말씀으로 삶의 나눔과 간증을 하도록 했다. 홍 정길 목사의 특징은 교회예산에 일체 간섭을 하지 않고, 교회정치를 일체 배제했다. 예배순서 중 잠자리채 돌리는 대신 본당 입구에 헌금함을 비치하고 자율적인 헌금제도를 정착시킨 것도 남서울 교회가 처음이 아닌가싶다. 나이 많은 여성도들에게는 누님, 남성도에게는 형님이라 불렀다. 사찰 집사에게 장로 피선거권을 주는 긍정적인 풍토를 이룩하여 임 창석 집사가 장로가 되었다는 사실 역시 한국교회 역사상 처음인 듯싶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매년 성탄일에는 홍 목사 부부가 과부들의 가정을 꼭 심방하여 위로했다는 감동도 남겼다.

 

고 남준우 장로님 댁에서 개척예배로 시작한 후, 우리교회는 두 번째 이사한 곳이 구 반포 삼거리에 있는 H2층 상가 건물이었다. 3년 동안에 300명이상의 교세로 성장하여 자가 건물이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당시 현재교회의 이 자리에 435평의 나대지가 매물로 나왔는데 그 중에 179평은 타교회 정 장노로부터 매입하였고, 상당한 시일이 지난 후에 인접된 256평은 고 정 봉석 장로님께서 본 교회에 헌납하였다. 1978.10, 22, 그 대지위에서 남서울교회건축 기공예배를 들였다. 625 전쟁이 끝난 후 그때가지 대한민국 어느 곳이나 그랬듯이 전쟁의 상흔이 아물지 않아 우리교회의 터도 아직은 황야 같은 허허벌판이었다.

 

교회를 개척하면 교회 질서 상 교단에 소속하는 것이 상례이기에 남서울 교회도 대한예수교 장로회 남서울 노회(합동측)에 가입했다. 이 기회에 교단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우리가 말하는 교단은 대한예수교장로회산하의 분파를 일컫는다. 그 당시에는 에큐메니컬 찬,반의 신학대학과 어느 정도는 관련이 있는데, 신학의 이념이 달서라기보다는 교권과 지역 간의 갈등에서 갈라진 것이 아닌가 싶다. 승동교회(총회신학대학중심)를 중심한 교단이 합동 측이고 연동교회 혹은 영락교회를 중심한 교단이 통합측(장신대학), 고신측 교단(부산에 있는 고려신학), 대신즉 교단(안양 새중앙교회 중심) 합신측 교단(합동신학교 중심)5개 중진교단이고 그 외는 군소교단이라 한다. 희망적인 것은 처음보다 지금은 교단 간에 강단교류를 많이 한다는 점이다.

 

합동 측에서 탈퇴한 우리 교회는 얼마 후에 합동 개혁 측 교단에(광주 고 정 규오 목사중심/지금은 합동 측과 합한 상태) 가입했는데 그 교단의 예산보다 남서울교회의 예산이 더 많았고 교회도 제일 큰 교회였다. 그때에 내가 사무장의 직책상 할 수 없이 그 소속노회의 임원도 맡아보았지만 그 교단과 우리교회와는 교회생리가 맞지 않아서 괴로웠다. 홍 정길 목사는 본래 정치는 안 하는 분이었고 우리교회장로들 역시 그 노회나 총회에 참석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 혼자 뛰기에 애로가 많았다. 그러던 중 2대 목사님으로 이 철 목사가 부임한 후 합동 측으로 재가입 하므로 교단질서는 잡힌 샘이 되었다. 한동안 합동측, 개혁측(광주중심), 합신측의 세 교단만이라도 합치기 위해서 홍 정길 목사가 각고의 노력을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여 안타까웠다. 그러나 그 후 합동 측과 개혁 측만이라도 합하게 되였으니 다행이다.

 

1981년에 합동측 교단에서 탈퇴를 한 것에 대하여 내 나름으로 추측하건데 그렇게 된 것은 총회신학교(현재사당동소재신학교)에서 고 박 윤선 목사님을 비롯하여 6,7명의 교수들이 신학교 개혁의 기치를 들고 그 학교를 분리해 나가게 되었는데 남서울교회가 교회 건물이 완공도 안 된 상태에서 그분들을 받아들였고 교수들을 따라나온 양 승헌 목사등(그 때는 학생) 다수 학생들이 신학공부를 우리 지하교육관에서 하기 시작하여 공부하던 중 문교부 인가를 받아 수원에다가 합동신학교를 세워 본 교회 공간의 신세를 면하게 되었다.

 

이야기가 너무 딴 데로 엇나갔나?

 

서초구청으로부터 우리 교회건축허가가 나왔다. 그 다음에 알게 된 것은 그곳도 현재의 파랑새공원과 연이어진 공원부지였다.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해야 할까. 행정착오라고 해야 할까.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아니었으면 그곳에 교회를 못 지을 뻔 했는데 건축과 직원의 인사조치가 단행되고. 교회건축은 문제없게 되었다. 그때 남 준우 장로님은 개인회사부진으로 채권자들로부터 조임을 당할 때였다. 교회입장은 건축비용을 당연히 건축업자에게 주어야 할 형편이고 채권자들은 그 건축대금을 담보로 요구할 것이 확실하여 많은 고심을 하던 중 교회 건축대금은 건축회계가 바로 남장로 부채정리금으로 직접 채권자들에게 지불하는 것으로 교회와 남장로 간에 양해가 되어 무난히 건축완공을 했다. 남 장로는 건축대금을 못 받아 유감이 아니라 내가 개척한 교회이니만치 교회건물은 꼭 내손으로 짓고 싶은 생각이 본심이었다고 했다. 그런 방식으로라도 본인에게 공사를 맡겨준데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교회에도 감사한다고 속마음을 털어 놓으면서. 만약에 그 건축이 다른 업자에게 넘겨졌다면 나는 눈물을 머금고 본 교회를 떠나려고까지 했다라고 말하셨다. 얼마나 정성을 들여 교회를 지었는지 40년이 지났는데도 바닥 타일 한 조각도 탈이 생기지 않았다. 남 장로님은 교회건축전문가였다. 나는 그분처럼 교회를 사랑하는 분을 여느 교회에서도 보지 못했다. 지하 1층의 공사가 마무리되어 입당예배를 드린 후부터 교회가 기하급수로 부흥하기 시작했다. 금방 500명 이상의 교세로 확장되어갔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교회를 신축함에 있어 경제적 고통을 겪기 마련이다. 나도 이태원 D교회를 지을 때 건축회계를 맡아 보았는데 전세방을 얻으려고 저금한 금액을 몽땅 교회 건축비로 헌금해버리고 대신 나는 몇 차례의 사글세방사리를 옮겨 다니며 살아온 경험이 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처음 대지헌금 한 번 하고, 건축이 시작된 후 건축 헌금 한 번 더 한 것 같다. 교회가 기하급수로 부흥해감에 따라. 경상비 예산의 잉여금이 생겨 그 잉여금을 건축 회계로 이체하여 건축시작 당시 차용금을 쉽게 갚을 수 있었다. 비교적 교회를 수월하게 지은 편이다. 아쉬운 것은 교회 로비의 공간이 너무 적어 험이다. 아마도 홍 정길 목사가 초창기에 외국나들이를 한 경험이 적어 설계상으로는 로비공간이 지금보다 훨씬 넓은 면적이었지만 교인석이 많아야 한다고 해서 로비의 공간을 줄여버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완공한 후, 본당은 줄과 줄 넓은 사이에 보조의자를 놓고 1,200명이 앉을 수 있었다.

 

인천과 춘천에서까지 우리교회로 나와 등록하기 시작했다. 홍 정길 목사는 교회는 가까운 데로 등록하십시오.’라고 자주 권고했다. 이웃 교인을 빼앗아 가려는 추세에 너그러운 목회지만 등록하는 성도로서는 서운하다고들 했다. 1985년 중반까지는 매년 12월경이 되면 매주일 등록교인이 30~40명까지였다.

 

담임목사에게 안식년을 허락한 교회는 남서울교회가 맨 처음이 아닌가 싶다. 대개 목회에 자신 없는 목사들이 안식년 동안에 교회에 문제가 생길까봐 용기를 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홍 정길 목사는 자신만만하게 안식년을 마치고 귀국하여 부목사인 박영선 목사에게 기존교인 300여명을 아낌없이 양보하면서 남포교회를 세우게 한 것이다. 지금은 그 교회가 우리교회와 교세가 비슷하지 않나 싶다.

 

한신 1차아파트가 재건축되기 전, 현재 신반포 상가는 천주교, 남서울교회, 신반포교회가 아니면 상가가 폐쇄될 정도로 어려웠다. 그런 형편에 우리교회가 1999년에 그 상가 지하 282평을 매입하여 교회가 숨통이 트이게 되고, 그 건물의 3층의 빈공간도 5개 처 정도 매입한 것이다. 덕분에 상가도 그런 데로 유지하게 된 것이다. 예상 밖에 교육관 공간이 생기므로 성도들만족스러웠다. 그 넓은 공간에 냉난방시설을 만드는 회사 사장인 김 익균 집사(지금은 타교인)가 약300평 규모의 그 공간에서 사용할 수 있는 냉난방시설을 완공하여 헌납했음에도 광고해주지 않아 그 시설 헌납 자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런 일이 종종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교회는 성도들에게 광고해주지 않는 것이 아쉬웠다. 당회는 좀더 세심했으면 좋겠다. 97년도에도 귀한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되어 전 영혜 권사가 첫 번 연주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되기까지는 전 영혜 권사가 3부예배피아노반주를 시작하면서부터 교회로부터 받은 사례금 전액을 매달 나에게 맡겨 파이프오르간 종자돈으로 저금하기 시작하여 그렇게 훌륭한 악기를 설치했음에도 강단에서나 어느 모임에서 그런 미담광고를 못 들어 봤다. 설치당시만이라도 전교인이 알도록 그와 같은 헌금미담을 한 번쯤은 이야기 해주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다만 장로나 권사를 시키려는 수단으로 하는 선전은 없어야 하지만......

 

1990년경부터 당회는 대형교회를 지양하고 형제교회를 세워나가기로 결의하였다. 그 결과 설립된 교회수가 6개 교회가 된 듯싶다. 1993년도부터는 하나님의 일을 더 크게 하기 위하여 장기발전위원회를 구성하여 매년 그 발전기금으로 1억 원씩 저축해나가기 시작했다.

 

어느 해에 중동고등학교 이사장 겸 교장 선생 가정이 우리교회 등록 교인이 되었다. 얼마 후 강남구 일원동 소재 중동고등학교가 부도위기에 처하자 그 학교 이사회에서 남서울교회가 그 학교를 운영해주기를 제안해왔다. 교회는 그 제안을 환영함과 동시에 그 넓은 강단에서 남서울교인들이 매주일 가서 예배하기 시작하여 1992년에 그 곳에 남서울 중동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우리교회에서는 좋은 미숀스쿨(mission school)을 운영하려는 꿈에 부풀었었는데 중동고등학교 동창들이 반대하여 그 학교는 삼성재단에 넘어가고 말았다.

 

1996년에는 홍 정길 목사가 폭탄 터드리듯 남서울교회 사임을 선언해버렸다. 모든 성도들이 너무 놀라 우왕좌왕 했으나 홍 목사 선언이 너무 확고해서 그대로 수용하고 2대목사로 미국의 중부교회 이 철 목사(남서울교회 초창기 부목사)2대 담임목사로 청빙하여 위임 목사로 세웠다. 아마도 홍 정길 목사가 사임한 것은 현재의 밀알학교를 지어 장애인 목회를 하고 싶은데 당회원들이 그 일에 너무 소극적인 것에 성이 안차 그렇게 한 것으로 나는 판단했다. 홍 정길 목사가 장애인학교(밀알학교) 설립에 온힘을 쏟으며 은혜교회(나중에 남서울 은혜교회)의담임목사가 되었다. 다행히 밀알학교의 건축은 고진감래 끝에 성공적으로 지어지고 대한민국 장애인 학교로서는 제일가는 학교로 발전해나가게 되었다. 남서울 교회가 나누어지기 전에 장기발전위원회 기금이 32어원 정도 저축되었는데 그 금액을 밀알학교 대지구입비로 전액 넘겨주었기 때문에 남서울교회도 밀알학교 설립의 공로자다.

 

남서울교회는 1985 년경부터 헌금의 45%를 선교 구제 등 이웃을 위해 집행키로 목표를 세우고 출발했으나 그 목표액까지 이르지 못했다할지라도. 매년 30 % 이상 대외비로 지출되고 있지 않나 싶다. 대형교회를 무조건 비판하는 사람은 그런 내용도 헤아려 주었으면 좋겠다.

 

특별한 것은 제직회의 각 위원회별로 대외예산집행 하는 것과는 달리 독립적인 대외집행기관의 세 부서가 있는데 승영장학회는 김 영심 전도사(사고 당시는 우리교회 집사)의 딸이 성수대교에서 참사사고로 소천한 후, 그 보상비 전액을 김 영심 집사가 헌납하여 설립한 장학회 재단(주로 신학생에게 지원)이고, 베데스터 재단은 우리교회 유치부 초대 전도사였는데 암 투병 중에도 오랫동안 호스피스 사역 중 소천 하여 그의 남편인 김 태문 장로가 이 덕희 전도사(이훈민장로 동생이기도 함)의 호스피스 사역기념재단으로 설립한 것이고, 세 번째는 황 호진집사 모자가 황 호진 집사의 부친께서 기업가로서 신앙생활 하던 중 소천하신 것을 기념하여 설립한 죽헌장학재단이다.

 

2004년 서초구립어린이집을 맡아 운영하면서부터 2005년에는 사회복지 법인 인가를 받아 지방자치단제와 연계한 사회사업을 효율적으로 하게 되었다. 서초구종합복지관과 서초구 어린이집 지원운영, 강남구립 노인복지관 지원운영을 하고 있으며 해외 선교사는 약140 가정에게 금년에도 8억 원 이상을 지원하고 있다. 이 모든 헌금 소진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성경적 정신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1996년에 2대담임목사로 이 철 목사가 교회를 위임받았는데 교세가 차츰 빈약해가던 중, 이 철 목사가 정년퇴임기가 되어 퇴임 시 3대 목사에게 바통 넘기기를 잘했다. 이어 3대목사인 화 종부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하여 바로 위임 식을 거행하고 교회가 활로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우선 어른 중심으로 말하면 2017101일 주일 대예배 집회수가 3848명으로 3대 목사 취임 직전보다 1200 명 이상 증가한 샘이고 홍 정길 목사의 안식년 시 집회수와 비슷해졌다. 성도들이 열정적이고 심풀(Simple)한 강해 설교에 감동을 받으며 목회에만 전심전력을 다하는 목사님이 좋아 컴백하는 성도들도 많았다. 교회 질서상 정돈이 잘 되어가고 지향해나가는 목표가 희망적이다. 제일 당면한 문제인 교육관 확충이 되어야 할 터인데 화 목사의 목회방침에 순응해가면서 쉬지 않는 기도와 간구가 필수라고 생각된다.

 

본 교회 정면에 나무 한 그루가 의젓이 버티고 서있다. 국제전도폭발 한국본부지원, 남서울교회 주관으로 1985, 첫 번째 전도폭발임상훈련을 마친 강사들이 강사비를 모아 기념식수를 한 것이 그 느티나무다. 반듯하게 잘 자라서 전도폭발의 상징성을 자아내고 있다. 파랑새 공원에 나란히 심겨진 두 그루의 느티나무도 역시 2년에 걸쳐 임상훈련 하면서 기념식수로 한 것이다

 

교회 정면에 향나무, 호랑이가시나무등은 남서울교회건축이 다되어갈 무렵 홍 정길 목사 부친인 고 홍 순호 장로님이 함평의 자기 집 정원에서 파다가 옮겨 심은 것으로 그 수목은 홍 정길 목사의 첫 목회의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 수목이다. 모든 수목들 역시 남서울교회와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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