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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9 (주일) 남서울교회 저녁찬양예배 - 종교개혁 특강>

종교개혁과 칭의론 ( 3:23-27)

박영돈 고신대 교수

신림동 작은 목자들 교회를 섬기고 계신다.

1. 다시 가열되는 칭의론 논쟁

종교개혁 중심은 칭의론.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한국 교회에선 칭의론에 대한 불만과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1) 이유 : 칭의론이 타락의 주된 원인으로 보기에. 믿기만 하면 믿는다고 가르치니. 성화 중요성을 약화 시켜서 방종에 빠지게 한다는 것.

(2) 칭의론 때문에 한국 교회가 타락하게 되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칭의론이 공공선을 무너뜨리는 악마라고 하는 신학자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진단이다.

칭의론 자체가 잘못이 아니라, 잘못 이해된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한 것이다.

지금의 칭의론과 그 때의 칭의론이 얼마나 다른지 모르기에 그렇게 잘못되게 진단하고 있다.

칭의론이 한국 교회에 제대로 전파∙이해되고 있지 못하다.

왜 성경만 알면 되지 교리를 왜 공부해야 하는가?” 싶을 수 있는데, 성경을 잘 이해하기 위해 교리도 알아야 한다. 성경은 빈 머리나 빈 가슴으로 읽혀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대개) 자신의 선() 전제나 틀로 성경을 읽는다. () 이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선() 이해가 얼마나 성경과 부합되는가? 충실한가?」가 중요하다. 성경과 교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할수록 성경의 의미를 왜곡하기가 쉽다. 성경의 본문이 의도하지 않는 의미를 자기에게 투사(投射)해서 자기가 읽고 싶은 대로 읽고 해석한다.

우리는 우리 선진들이 이 성경을 어찌 읽고 해석했는지를 배울 필요가 있다. 교회 역사 속에서 선진들이 어떻게 성경을 해석했는지 정리한 것이 교리이다.

칭의론은 성경에 있는 구원에 대한 진리이다.

구원에 대한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공부해야 하고, 교회의 오랜 역사 속에서 합의된 가르침을 배워야 하며, 그래서 교리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2. 종교개혁의 논쟁

16세기 종교개혁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죄인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가?”였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하지 않았다. 그들도 은혜로 인한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하는데. 그들은 믿음만이 아니라 사랑으로 의롭게 된다고 한다.

우리는 예수를 믿을 때 의롭게 된다고 확정적으로 내려진다고 본다. 칭의는 과정이 아니다. 그런데 로마 교회는 일평생에 걸쳐 일어나는 과정으로 보며, 이 땅에서 온전해진 사람은 천국에는 소수만 들어 갈 수 있고, 대부분은 연옥을 가야 한다고 말한다. 연옥에서 못 이룬 성화 과정을 거쳐야 온전하게 의롭게 된 후에야 천국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면죄부 반박문을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 교회에 붙였다.

세례 받고도 죄를 지면 칭의가 취소될 수 있다. 고해성사를 위해 사제(신부)에게 가서 자기 죄를 고백하면 사제가 죄의 질에 따라 일종의 참회 행위를 요구한다. 성찬 금지 당하거나. 고행을 하는 등 여러 참회 행위가 요구된다. 처음에는 가혹할 정도로 엄격한 행위 요구되었다가 면죄부 직전에는 느슨해졌다.

로마 카톨릭은 고해성사를 주기적으로 받아야 성화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성례를 중요시한다. 범우주적인 로마 카톨릭에서 개인 구원을 맡아준다. 교회 예식에 충실히 참여하라 하라, 교회를 믿으라는 것이다.

이런 로마의 가르침으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 없어도 제도에 충실히 참여하면 구원받는 것으로 제도적 구원이 개인적 구원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

3. 칭의의 근거

이 땅에서는 완전히 의로움을 이룰 수 없다. 우리들이 실제적으로 얼마나 의롭게 거룩하게 돼야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을까? 인정받는 날은 오지 않는다. 그런 날이 온다면 우리는 무서운 자기 기만에 빠지게 된다. 더 거룩해질수록, 주님의 임재 가까이 앞으로 나갈수록 우리에게 빛이 비춰져서 우리의 허물인 죄를 보게 된다. 아직도 멀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땅에서 살며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없다. 구원의 확신이 위협 받으면 참된 경건 신앙을 얻기 힘들다. 하나님 자녀라는 확신 없는데 은혜의 보좌에 어찌 담대히 나아가겠는가? 우리가 사랑 받는 존재라는 확신이 없는데 어찌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하겠는가?

4. 오직 믿음

종교개혁자들은 구원은 신분적으로 의롭다 인정받는 것으로 이해했다. 오직 믿음으로!

칭의는 과정이 아니다. 진행되는 과정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즉각적으로 내려진 하나님 판결이다.

칠판을 쓰겠습니다.

(1) 로마 카톨릭 교회 : 실제적 의로움. 믿음 + 사랑 → 일평생의 과정

(2) 종교개혁 : 신분적 의로움(신분의 변화)의 법적인 선언. 과정이 아니라 즉각적∙확정적 판결 → 오직 믿음. 이것이 중요하다.

라틴어로 Sola Fide. Sola는 오직(Alone), Fide는 믿음(Faith). 이런 의미가 성경에 내포되어 있다.

오직은 어떤 의미인가?

첫 번째 의미는 오직 믿음하면 믿음 외에 다른 것은 배제한다는 것이다.

배제한다는 의미(Exclude)는 두 가지를 배제한다.

⑴ 믿기 전 행했던 의로움과 선행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을 공로가 없다.

⑵ 믿은 후의 의로움과 선행(거듭남. 성령의 열매). 이런 열매가 있어야 하나 이 성령의 열매는 공로적 가치가 없다. ? 성령으로 충만해서 거룩함의 열매 맺어야 하지만 그 거룩함은 심히 불완전하고 죄로 얼룩져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탁월한 거룩함이라도 작은 진전에 불과하다고 했다. 거룩함의 열매를 맺어야 하지만 죄로 얼룩져 있기에 의롭다 인정받는다 해도 구원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오직의 두 번째 의미는 집중(Focus. Concentrate)이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오직 우리 밖에서 이루어지는 의로움에 집중한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의로움만 칭의의 근거로 바라보고 의존한다는 것이다. ⇒ 낯선 의로움. 우리 안에 있는 의로움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루신 그 의로움이다.

칭의의 근거는 우리 안에 전적으로 없다. 우리 밖에도 없다. 예수님이 행하신 의로움에만 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기에 당신이 원하시면 우리 죄를 마음대로 사하실 수 있을까? 구약을 보면 악인을 의롭다 하는 자를 미워하시고, 무전유죄 유전무죄를 싫어하시는데, 만약 그렇게 하신다면 하나님은 공의로운 심판관의 자격을 스스로 박탈하시는 셈이다.

악인을 의롭다 하신 일을 하시면서도 당신이 의로우실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시기 위해 엄청난 대가를 치르셨다. 당신의 아들을 죽게 하셨다. 화목 제물로 삼으셨다. 오늘 본문 말씀( 3:23-27)이 그러한 의미를 담고 있다.

주님이 갯세마네 동산에서 땀 방울이 피 방울이 되도록 고뇌하시며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옮겨달라고 하셨다. 주님이 그토록 두려워한 잔? 구약을 보면 마지막 때 하나님이 악인들에게 진노의 잔을 쏟으신다. 악인에게 줄 그 잔을 사랑하시는 아들에게 부으셨다. 그것도 찌기까지 남김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으면서까지 그 희생으로 죄에 대한 진노가 제거되어 -예수님이 진노의 화목제물이 되어- 우리가 하나님께 죄 사함과 의롭다 함을 받게 되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게 하신 것은 예수님의 칭의다.

예수님은 죄인처럼 심판 받으셨지만 다시 살리심으로 그분이 의로우시다는 것을 확정하셨다.

완전한 의로움은 예수님 본성적인 의로움은 아니다. 하나님의 의로움도 이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법정대리인으로 우리 자리를 내려오신 것이다. 율법 아래로 오셔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온전히 이루셨다.

칭의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⑴ 죄 사함 받는 것. 우리 모든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해서 우리가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윤리적 공백상태에 있다고 의인이 되는 게 아니다. 우리에게 적극적인 의로움이 전가되었다. 법적으로 Transferred. 비천한 가난한 여인이 부자 남편을 만나 그 소유를 공유하는 듯이. 죄인이 온전한 예수님을 만나 영원히 결합하므로 그분의 의로움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었다. , (죄로 얼룩진 옷을 벗겨버리시고) 완전한 의의 옷을 입혀주신 것이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것을 「복된 자리 바꿈」이라고 했다. 죄인의 자리에서 의인의 자리로!

우리가 전에는 죄인의 자리에 서 있었는데 예수님이 죄인의 자리에 오셨다. 비참함을 그분이 다 감당하셨다. 그덕에 우리가 의인의 자리로 옮겨 앉았다. 의인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영광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성령의 선물인 영생이 이런 모든 축복의 자리가 바뀜으로 주어진 것이다.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비참과 속박에서 최상으로 바뀌었다. 놀라운 은혜이다. 우리가 최악의 상태에 있었으나 최상의 은혜로운 자리로! 우리가 한 것은 없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다.

믿음은 「이 의의 선물을 우리가 받는 빈손」이다! 하나님이 의라는 선물을 주시는데 빈손을 내밀어야 한다. 값을 주고 의를 사려는 사람의 손은 거절하신다. 선물을 주지 않으신다. ⇒ 자기 공로를 놓아버린 텅 빈 손이 바로 믿음이다.

⑵ 믿음의 유일한 가치는 우리 밖에서 이뤄진 완전한 의로움만 바라보는 것이다. 믿음이 믿음 자신만 바라보는 한 아무런 가치가 없다.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믿는다. 자기 믿음을 의존하는 심리가 우리에게 있다.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큰 산을 옮긴다. 예수님 의로움만 바라본다면 태산 같은 우리의 죄가 바다 속에 다 빠지게 되는 위력이 있다. 모든 죄가 사함 받고, 태산 보다 높은 은혜 사랑이 우리 앞에 옮겨지는 효력이 있다.

5. 성화 없는 칭의?

성화는 칭의와 함께 자주 사용하는 개념이다.

성화는 평생의 과정으로 칭의 근거로 구원을 받고, 그 후에 성화는 구원과 직접 연결되지 않으며, 성화는 죽은 후에 상급 받는 것과 관련하여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고, 성화의 열매가 없어도 구원에 이른다는 값싼 구원의 은혜에 빠지기 쉽다. 많은 신학자들이 이런 문제를 지적한다.

교리에서는 논리적 순서로 이 두 개념을 구분한다. 하나님 구원의 은혜는 다각적 측면이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성령의 내주 등. 구원의 풍성함을 위해 논리적으로 구별하는 것뿐이다. 시간적으로 두 단계로 이어졌다고 개혁신학자는 생각하지 않았다. 칼빈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면, 칭의와 성화가 동시적으로 주어진다고 했다. 칭의와 성화가 우리 신앙생활 전 과정에 병행된다. 칭의와 성화는 단일한 구원의 두 면이다. 두 가지는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면 거룩하게 하신다. 구원은 성화의 의무가 수반되는 것이다.

우리의 경험에서는 두 가지가 동시적이다. 그 누구도 둘 중 하나만 체험할 수 없다. 성화 없는 칭의도, 칭의 없는 성화도 체험할 수 없다. 이 두 가지의 은혜는 신앙생활 동안 긴밀하게 연합되어 함께 간다. 성화에서도 즉각적으로 이뤄지는 면이 있고, 점진적으로 이뤄지는 부분이 있다. 성화란 하나님의 임재로 구별된다. 죄에 속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옮긴 바 된다. 우리들이 다 느끼지는 못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놀라운 성화의 은혜가 이뤄진다. 이를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성화라고 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거룩한 사람이 된 것을 말한다. 고린도 교인들에게 거룩해진 성도라고 바울을 말했다.

점진적 성화는 Up & Down으로 이루어 진다. 우리는 이미 거듭났다. 근본적인 성화이다. 그러나 칭의와 성화는 특성상 구별이 되어야 한다. 칭의는 즉각적이고 변동이 없다. 그러나 성화는 점진적이다.

구원에 다양한 측면이 있음을 말했다. 양자됨, 성령의 내조, 그리스도와의 연합 등.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엮여 있다. 퍼킨슨은 "황금 구슬로 이 모든 은혜가 엮여 있다"고 했다. 하나만 체험할 수는 없다. 구원에 여러 단면이 있는데 성화, 중생 등을 다 분리해 칭의만 구원의 모든 것이라 말하면 곤란하다.

칼빈에 의하면 성화가 없는 칭의란 전혀 불가능하다. 구원받아 의롭게 되면 거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는 못하지만, 행함 없이는 구원받지 못한다고 했다. 행함은 칭의의 전제조건이 될 수는 없지만, 행함의 거룩함이 칭의의 열매로서 주어져야 한다. 행함과 거룩함은 칭의의 조건은 아니지만, 행함과 거룩함이 전혀 없이 덩그렇게 남아있는 믿음은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은 죽은 믿음이다.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보자. 칭의는 실질적인 의로움에 근거하지 않는다. 로마 카톨릭의 가르침은 칭의와 성화를 혼합해버린다. 실제적으로 변화하면서 칭의가 완성된다. 이렇게 되면 확신할 수가 없다.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칭의를 근거해서 불안정한 선행인 열심과 봉사가 인정받는다. 이 부분에서 칼빈은 행위를 통한 칭의는 배격하고 부정하면서, 행위의 칭의를 강조한다. 무슨 뜻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데 우리의 인격과 존재(Being)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사역(Acting)도 의롭다 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평생 봉사하고 선한 일을 행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것이 주님의 완전한 의의 기준에 대해선 부족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칭의에 근거해서 우리 존재가 하나님께 인정받듯이 우리 거룩함도 인정받게 된다. 인정뿐 아니라 상급까지도 받는다. 행위의 칭의가 바로 그것을 의미다.

6. 기독론적-종말론적 구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확정적인 칭의의 의를 받았다. 이제 마지막(Final) 선고가 내려질 것이다. J.C. 라일은 천국에 있는 성도들이라도 우리들보다 칭의되지 않다고 했다. 칭의는 우리 밖에서 예수님이 완전히 이루신 의로움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우리에 대한 무죄판결은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다. 마지막에 가서 의인으로서 영광 누리게 될 것이다. 이 땅에서 성령이 마지막 구원과 영생의 보증이요, 첫 열매이다.

우리 안에 성령님이 와 계시는 것은 너희 안에 시작한 구원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분명한 보증이다.

칭의의 즉각적 두 가지의 열매

⑴ 현재적인 부활 : 영적인 생명을 얻는 것. 영적인 부활

⑵ 미래적인 부활 : 우리 육체의 부활

⇒ 둘 중 하나만을 채용할 수 없다. 영적 부활을 체험하지 못하면서 육체적인 부활을 체험할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두 가지 은혜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부활의 생명의 능력은 마지막 때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 우리는 매주 부활의 생명을 누린다. 매일이 부활절이다.

칭의의 즉각적 열매 :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에게는 성령이 내조한다. 성령이 종말론적인 구원의 보증이다.

현재적 하나님 나라와 미래적 하나님 나라 : 하나님 나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임재하는 나라.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면이 있다.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가 아니라 살아서 만들 수 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지점이고, 천국은 하나님 나라의 본점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내게 임했는가를 점검하며 돌아보며 신앙생활 해야 한다. 평생 하나님 나라의 문 앞에서 서성이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구실을 못하면 되겠는가? 성령 안에서 이 두 부분이 다 연결되어 있다.

의롭다 함을 얻게 되면 온전한 하나님 나라로 옮겨가게 된다. 이것이 칭의의 축복이다.

우리는 칭의의 반석을 떠나서 한 순간도 주님 앞에 설 수 없다. 매일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데 어떤 은혜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나아가는 것인가? 오직 칭의의 은혜를 매주 의지해서, 예수님의 완전한 의로움에만 근거해서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목사도 매주 강단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수종 들면서, 일주일 다르게 살려고 하지만 항상 부족하다. 칭의의 은혜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신앙생활 하는데 거룩하게 사는 것도 문제일 수 있다. 성결하게 살 때 훨씬 더 무서운 죄에 빠질 수 있다. 영적 우월의식인 교만이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께 헌신할수록 자신의 의로움을 의지해 나갈 수 없다. 예수님 의로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더욱 더 칭의만을 의지해 나아가는 것이다.

칭의에 근거한 기독교 교리인 겸손 : 자랑할 것이 없다. 평생 자랑할 것이 없다. 밖에 있는 의로움만 자랑하고 높이는 것이다. 우리 신앙생활은 실패를 통한 성숙의 과정이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조금씩 성숙한다. 우리는 아무도 회개가 필요 없는 완벽한 삶을 살지 못한다. 매일 회개하고 칭의의 은혜에 의존해야만 한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신앙생활에서 우리는 연약해서 다 쓰러진다. 쓰러졌을 때 잘 일어나는 것이 필요하다. 잘 일어나는 비결은? 하나님의 은혜, 칭의의 은혜이다. 그것이 우리를 다시 일으키는 영적 바탕이며, 회복의 바탕이다. 칭의의 은혜가 다시 두 번째 기회(Second Chance)를 준다.

실패의 두려움으로 또 실패한다.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죄를 멀리해야 한다. 그런데 연약해서 쓰러진다. 다시 일어서게 하는 은혜가 칭의의 은혜이다.

마음은 삼십 대인데 벌써 은퇴할 때가 되었다. 곧 하나님 앞에 설 것 같다.

교회사에 훌륭한 목사님이 계셨다. 임종 시에 불신자처럼 아주 두려워하며 불안해하며 임종을 맞으셨다. 얼마든지 이럴 수 있다. 우리는 보통 안 믿는 자는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다. 믿는 자는 평안히 죽는다라고 생각한다. 꼭 그렇지도 않다. 안 믿는 사람은 하나님 존재를 믿지 않기에 두려움이 없다. 그래서 안 믿는 사람도 담대하게 죽음을 맞이 하기고 한다. 믿는 사람은 심판이 있음을 믿는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심판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는다.

우리가 의존할 것은 십자가에서 이루신 완전한 의로움이다. 평생 거룩한 생활했다 해도 그것을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설 수는 없다. 부실한 거룩함으로 어찌 하나님 앞에 서겠는가?

7. 정리

구원은 칭의보다 포괄적이다.

구원은 여러 측면을 포함하는 큰 개념이다. ⇒ 구원 = 칭의 + 성화

⑴ 과거시제

에베소서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구원의 과거적 측면이다. 즉각적 성화. 결정적(근본적) 성화.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 성령이 전이되어 우리는 거룩한 자가 되었다.

⑵ 현재시제

빌립보서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성화는 점진적이다.

⑶ 미래 시제

로마서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미래의 구원 : 칭의의 바탕에 의한 신앙생활. 달라지는 것은 성화이다. 마지막에 성화가 완성된다.

완전한 성화 = 영화

구원이라는 개념은 칭의 보다는 더 넓은 개념이다.

믿기만 하면 행함 없어도 구원 받는 것은 전체적으로 이해 못한 것이다.

성화의 열매를 반드시 맺게 된다. 성화의 열매는 칭의의 전제조건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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