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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T나눔 순복음

2018.02.05 01:37

연금술사의에메랄드 조회 수:307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궁핍한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눅 15 :11~22)



하나님은 기묘자이십니다.

하나님은 헤아릴 수도 측량할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기묘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 사랑해서, 우리가 그 분과 화목하길 바라셔서 귀찮아하지 않으시고

엄청난 일들을 행하셨으며, 뿐만 아니라 이 사역들을 성경에 기록으로도 남겨 주셨습니다.

성경을 통해 배울 수 있는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건져내 주시고’, ‘동행’ 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찾아오시는지 알아볼까요?

그런데 잠깐,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어디에 있기에 주님께서 찾아오셔야만 합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가출하였다” 

어쩌다 가출청소년(?) 신세가 되었나요?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 4:5~6)


이 사건 이후,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가출을 감행합니다.

가인의 아버지 아담은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을 믿었어야 했지만

 유혹으로 인해 그 믿음을 견고하게 세우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러니 아들 가인이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이 하나님을 가르치고 하나님 위에 군림하려 하는 것이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닙니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사람에게는 딱 두 가지의 길만이 있다는 점입니다.

아벨처럼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순종하는 길, 가인처럼 하나님위에 군림하는 길

이렇게 두 길 사이에서 한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길 아니면 저 길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가인의 길을 선택한 사람을 향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롬 1:21~24)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시는(사람이 누리기로 계획되었던)

영원한 생명과 거룩함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가출한 우리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은 이러이러하다, 그러니 나쁘다” 이렇게 몇 마디 말로 우리를 다그치거나 가출을 막으려 하시지 않고

 자기 재산을 털어 가출을 허용하십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재산을 털어 가출을 허용하실 때, 실은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고 계시는 중이신 것입니다.

물리적으로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지만, 그 만큼 아버지는 아들의 심연으로 들어오고 계십니다.

아들의 심연은 어떠합니까? 아버지에 대한 불신과 거부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한 아들의 심연으로 찾아오고 계십니다.

아래 말씀을 함께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같이 네게도 그리하는 도다 (삼상 8:6~8)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그 과정은 정말 험난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니까 뭐든 쉽게쉽게 하신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정말 그러한가요? 그 반대로, 진정 애타는 심정을 가지고 찾아오시는 겁니다.

언제부터 하나님은 우릴 찾아오셨을까요?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이토록 오래 전부터 하나님은 가인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를 찾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싫어서 떠났는데 하나님은 버리시거나 죽이시거나 잊지 않으시고 우리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연히 우리를 어떻게 건져내실지 그 완벽한 방법도 가지고 계십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에 대하여 바울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롬 7:10)


왜 기껏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분이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율법을 주십니까?

우리의 엄청난 거부감을 뚫고 성큼성큼 우리의 심연으로 찾아오시던 그 분이 별안간 갑자기 왜 그러하십니까?

반드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목적은 사망이 아닙니다. 사망은 율법의 두 가지 결과(사망 or 생명)중 하나일 뿐입니다.

율법의 목적은, 우리가 사망에 이르는 그 정확한 이유를 가르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고 기묘자이십니다. 우리가 헤아릴 수 없고 측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옳다고 해야 옳은 것이지 우리 머리로 그 분을 재단해서도 안 되고 선을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아담 이래 최초의 가출한 자, 가인을 닮아서 자꾸 하나님을 우리 생각 안에 가두려 합니다.

그냥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선을 갈망하면 되는데 꼭 우리가 선을 추구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꼭 우리 스스로 선한 자가 돼야 직성이 풀립니다.

이건 정말 정말 정말 치명적이고, 하나님이 가장, 정말 가장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달이 태양의 빛을 받아 반사함으로써 빛을 내야 하건만,

 “태양 필요 없어 나 스스로 빛을 발할래” 이렇게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지존하신 주님께 배워야하는데 지존하신 주님을 가르치려 듭니다.

바로 이것이 사망의 가장 정확한 이유입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사14:12~14)

 

이런 우리의 성향을 보신 하나님은 정말 통탄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우리의 교만이 얼마나 하나님께 큰 아픔이 되고 있습니까?

율법을 주신 건 이런 교만한 우리를 건져내시기 위해 그 존엄하신 하나님께서 일단 우리 생각대로 행동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 정 그렇다면(그렇게 스스로 선한 자, 가치 있는 자가 되고 싶으면)

한번 너희들이 추구하는 선한 세계를 만들어 봐라(즉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나랑 ‘deal'을 해보자)”

스스로 깨달아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연 그 한 가운데로 찾아오시기 위한 방편으로 일단 율법을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실패로 끝날 것임은 자명하며, 이 실패에 대해서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고 있는 그 동일한 시각,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지른 만행을 통하여 미리 암시하십니다.

울법의 결과가 어떻습니까? 로마서 7장 10절 말씀처럼, 사망입니다.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성도님들께서는, 자식으로 인해 재산상의 큰 손실을 보신다고 해도

자식을 혼내기는 할지언정 버리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손실이 이미 일어나버린 시점이 아니라,

막대한 손실(거의 죽음에 가까운)이 예상되는 일을 자식이 벌이기 직전의 시점이라면 어찌 하시겠습까?

막으시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리 하지 않으셨습니다.

둘째 아들이 가출할 때, 자기 전 재산의 절반을 떼어준 아버지의 마음,

사울 왕을 세우실 때의 아버지의 마음, 율법을 주실 때의 아버지의 마음...한결같습니다.

율법의 결과가 사망이라는 걸 당연히 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속에서,

그 사망은, 우리의 사망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사망입니다.

 

이것이 기묘자이신 하나님의 계획이고 은혜이고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 죽이심으로써, 가출한 우리의 심연 그 정확한 가운데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지 않고 내가 선하다고 고집 피우는 우리의 심연, 우릴 구속하고 있는 그 감옥으로 말입니다.

그 다음은 우리를 건져 주시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 죽임으로써 우리를 용서하겠다는 것,

그 용서를 받아들이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우리는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믿음으로써 우리를 건져내시고 우리와 다시 화목하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원래 창조목적(영원한 생명, 거룩함)을 달성하십니다.

이렇게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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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이후의 삶



이렇게 멀고도 멀고, 험하고도 험한 길을 통해 우리의 마음의 집에 하나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이제 정말 모든 눈물과 어둠이 사라지고 행복함과 믿음, 찬양만이 존재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황당한 일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예수님의 희생도 가치 있긴 하지만,

구원을 위해선 할례나 이런저런 제사법,

아니면 아브라함의 피도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은근슬쩍(그러나 치명적인)

예수님의 공로를 무너뜨리려는 미혹이 존재합니다.

물론, 요즘시대는 이런 말들이 우습게 들리겠지만, 바울시대에는 꽤 영향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과연, 바울을 괴롭혔던 미혹이 지금이라고 없겠습니까? 제사법 따위는 아닐지라도,

뭔가 다른 형태의 미혹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미혹뿐만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내재 되어 있는 그 뿌리 깊은 가인의 속성으로 인해 때때로,

우리 스스로 복음을 훼손합니다.

성도는 이에 맞서서,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믿음이 전부인 사람답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가인처럼, 자신의 생각대로 하나님이 움직여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것을 선으로 여겨야 합니다.

우리를 찾아오시고 건져주심으로써 우릴 향한 그 분의 사랑을 손수 증명해주신 그 하나님의 선하신 지배 말입니다.

하나님 외에,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것 외에 그 어떤 것도 선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 싸움이 복음 이후의 세대인 우리가 할 일입니다.

감사하게도 이 싸움은 우리 혼자 하지 않습니다.

본디 사랑이라는 것이 ‘사랑했다’는 역사적 사실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현재 진행형이어야만 합니다.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약속대로 성령님과 동행하며 무조건적인 사랑을 한결같이 누리며, 이 싸움을 하는 것이지 우리 혼자 하지 않습니다.

성령님과의 동행....그리고 성령님과 함께하는 싸움....정말 멋있지 않습니까? 하고 싶지 않습니까?

이 싸움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예화를 들겠습니다.


꼬부랑 할머니가 자기 집 앞의 마당을 빗자루로 쓸고 있습니다.

그런데 험상궂게 생긴 조폭 두 명이 우람한 덩치를 자랑하듯 쿵쾅거리며

할머니를 향해 다가옵니다.

성도님들께서는 할머니가 어떻게 하셨으리라고 상상하십니까?^^


1.집 안으로 서둘러 들어가 문을 잠그고 경찰에 신고한다.

2.빗자루를 들고 되레 조폭들을 겁박한다.

3.나이 많고 가진 것 없음을 강조하여 동정심을 유발한다.


셋 다 나름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이 할머니는, 그냥 조용히 담담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는 너희들이 올 곳이 아니다. 빨리 사라지거라”

그걸 들은 조폭은 바로 말없이 ‘자연스럽게’ 돌아갔습니다.

할머니는 ‘자연스럽게’ 하던 빗자루질을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할머니 입장에서는 그게 너무 당연했습니다.

조폭들이 길을 잘못 든 것입니다.

왜 꼬부랑 할머니 집 쪽으로 조폭들이 와서는 안 됩니까?

자기 집에 지금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방금 전에 주님과 같이 식사를 했고 아직 소화도 다 안 되었습니다.

지금 꼬부랑 할머니는 성령께 완전히 압도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 상황에 조폭이 조폭으로 보이겠습니까?

아마도 예수님을 귀찮게 할 모기정도로 여기지 않았을까요?

꼬부랑 할머니는 예수님을 위해 그냥 모기 두 마리 잡은 겁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사 40:30~31)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겔 36: 26~27 )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 8:15~16)


성도는 바로 이 꼬부랑 할머니와 같은 방식으로, 유혹과 미혹 그리고 자신의 습성과 싸워야 합니다.

진정한 성도는 성령님께 압도된 만큼만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선해지려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 지배를 받아야만 선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가인처럼 가출한 자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집에 함께 거하는 아들입니다.

바로 이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그 먼 길을 하나님께서 우릴 찾아오시고 건져주셨습니다.

내가 오늘 무엇인가를 잘했다고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주님이 입혀주시는 옷에 만족해야 합니다. 다시 율법 아래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상상하시고 희망하시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기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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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용편


하지만 성령충만했던 바울도 이 싸움이 그리 만만치는 않다고 이야기 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롬 8:17)


정말로 그러합니다. 우리 육신은 여전히 그대로 이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함을 자랑했던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말 할 것도 없습니다. ‘미혹하는 자’의 존재도 빼놓을 수 없지요.

또 아버지께서 자녀인 우리를 가르치시기 위한 목적으로 징계하는 순간을 맞이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 와중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해야 할 의무(특권)가 있습니다. 쉽지 않을 만합니다.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삼아 진정 피조물다운 모습을 회복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진정 피조물다운 모습이란, 하나님의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가인 처럼 자신이 스스로 빛을 발하는 사람이 아닌, 아벨과 같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승천 하신 후의 베드로, 기독교 역사상 이 베드로만큼 많이 경험하고 많이 변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도 성령님께 배워야 했습니다. 성령께서 그를 깨우쳐 주시지 않으셨다면 베드로조차 불법을 저지를 뻔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또 두 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행 10:14~15)

 

리는 그 분의 빛을 항상 받고 살아야만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선이 무엇인지는 주님께서 판단합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정말로 만약에 (그럴 일이 없겠지만) 제 안의 성령께서 제게 살인을 저지르라 하면, 살인하겠습니다.

저는 모태신앙(못된신앙) 출신입니다. 어려서 성경을 읽었을 때 가장 처음 생긴 질문입니다.

 “다윗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왜 이렇게 잔인하시지? 사람 목숨을 너무 함부로 대하시는 거 아닌가?”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세례요한의 생명을 거두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합니다.

우리가 진정 피조물다운 모습을 회복해야, 하늘에서 주님이 웃으시고 다른 피조물들도 행복합니다.

혹 애완견을 키우십니까? 겉보기에 귀엽게 행동할지 모르지만, 사실 애완견은 지금 불행한 상태입니다.

애완견뿐만이 아니라 까치, 비둘기, 그 외 모든 짐승이 그러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롬 8:19~22)


정 피조물다운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가 집중해서, 전력을 기울여서 할 일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죄가 정확히 무엇인지 가르쳐야 하고 그런 죄인을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정확히 가르침으로써

우리 스스로가, 그리고 우리 이웃이 진정 피조물다운 모습을 회복하도록 일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피조물다운 모습을 회복하는것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예수님께서도 시험을 당하심으로써 몸소 본을 보이셨습니다.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마 4:2~4)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어떤 상황에서든 철저하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야,

아래의 유명한  성경 구절을 온전히 소유하실 수 있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3~34)



혹 낙심되는 일이 있으신가요..

신실하신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우릴 찾아오시고, 독생자의 목숨을 희생하여 우릴 건져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

성도님들께서는 성도님을 향한 이 사랑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오래 되었습니다.

실은, 오래된 정도가 아닙니다. 시간의 시작부터였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1~3)


러니 낙심되시는 일이 있거든

우리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끝까지 지켜주시리라고 다시 한 번 믿음을 굳세게 하십시오.

낙심되는 일은, 결국 우리의 믿음을 더 굳세게 할 기회일 뿐입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


이렇게 진정 피조물다운 모습을 하나하나 회복해가다 보면,

끝날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분명 잘 했다고 칭찬하시며, 상급을 꼭 주실 것입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계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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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6 2023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수험생 자녀를 위한 기도회 file 2022.11.22 남서울교회
1645 2022년 청소년 세례∙간증 예배 file 2022.11.13 남서울교회
1644 2022년 가을 성례주일_성찬식 file 2022.11.10 남서울교회
1643 종교개혁 주일저녁예배 file 2022.11.02 남서울교회
1642 2022년 사랑의 음식 바자회 file 2022.11.02 남서울교회
1641 2022 사역박람회 file 2022.11.02 남서울교회
1640 2022 임직식 file 2022.11.01 남서울교회
1639 바자회를 위한 기도회 file 2022.10.29 남서울교회
1638 2022년 교사 및 학부모 세미나 file 2022.10.27 남서울교회
1637 새생명축제 둘째 날_주일(2022.10.16) file 2022.10.19 남서울교회
1636 제국주의의 앞잡이를 차별하지 않으신 예수님 [1] 2022.10.18 김용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