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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 6:54~55)


교회는 복음위에 서야하고, 복음을 수호해야 하며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역할을 담당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성도는 교회 안에 함께 모여 복음을 누리면 됩니다. 복음을 누리는 가운데 복음을 수호하고 전파하면 됩니다.

교회가 무엇이냐? 또, 성도는 누구냐? 그 대답은 이처럼 아주 간단(?)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정작, 복음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간단치 않다는 점입니다.

교회를 정의하는데 ‘복음’이라는 단어를 세 번 사용했는데, 이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그 의미가 어렵습니다.

(어려운 정도를 떠나서, 절대로 이성으로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미리 선포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그 분께 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6:44)

 

‘복음’이라고 하는 지고한 진리는 두 개의 기둥이 떠받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도 66권 전체를 통하여 이 두 개의 기둥에 대해 끊임없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기둥=우리의 정체성;

          복음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 기둥=>하나님의 사역;

          복음은 그런 우리를 위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를

         설명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는 지난번 글 ‘순복음’에서 다룬 바 있으니 본 글에서는 이쯤에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다만, 많은 분들이 복음을 별로 안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복음이 왜 좋은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 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저희가 무서워하더니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눅 9:26~36)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살아계셨을 때, 비록 제자들이 그 분을 따르기는 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별로 안 좋아했습니다.

정말 많은 기사와 표적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처럼 평범한, 즉 그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일개 평범한 사람이

 신의 아들이고 메시아라는 사실을 못미더워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예수님은 그 분의 신성을 충분히 입증할 수 있는 일을 하실 때마다,

그 일들을 비밀로 하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심지어 베드로에게도 그리하셨습니다.

 본문에서도 비밀을 지키고자하시는 예수님의 열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염두에 두고 ‘죽기전에’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6일 후에 보여주실 것인데 ‘죽기전에’라고 말씀하시며 시점을 흐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졸도록’ 하시고 또 ‘자기가 하는 말은 자기도 알지 못하게’ 하십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의도하신대로,

그들은 엄청난 일을 겪고도 ‘아무에게도 이르지 않게’ 됩니다.

그 세 사람은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는 어떠합니까?

1)우선 부활이 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살아있고 또 예수님과 대화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내 아들 예수의 말을 들으라”는

2) 하나님의 목소리가 백성에게 직접 들립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며 이 세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죽기 전에 목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죽기전에’라는 표현을 하실 때 ‘내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에’ 라고

말씀하고픈 마음도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야만 오는데,

 그 전에 미리 하나님께서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는 하나님의 나라를 목격하고도 그 당시는 온전히 인지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아직 ‘죽기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항상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셨던 이유,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성공적으로 못박히기 위해서였습니다.

성공적으로 자살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성공적으로~~

 

베드로는 이 사건을 언제쯤 다시 떠올렸을까요??

주님께서 그에게 보여주시긴 했지만 일단 머릿속 깊숙한 곳에 숨겨두셨던 이 기억을 말입니다.

언제 다시 떠올릴 수 있었을까요? 당연히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까지는 절대 못 떠올렸을 것입니다.

이 말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던 그 때도 기억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원수로서의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했고,

그런 자신을 위해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보고, 그리고 다시 살아나신 후 자기를 다시 불러주신 예수님 앞에서야

비로소 ‘그 때 그 사건’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복음을 누린다 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수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야합니다.

그런데 그런 원수같은 나를 자신의 목숨보다 기꺼이, 열정적으로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요 4:23~24)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예수님의 보혈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예

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말은 본인 스스로가 하나님의 원수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인 것입니다. 원수인데, 그렇게 살과 피를 주실 만큼 사랑하신다니 복음인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실상은 어떠합니까?

자기 자신을 무지하게 사랑합니다. 자기가 보기에 자기 자신이 엄청 사랑스럽습니다.

자신의 이성과 열정 판단, 마음 안에 품고 있는 이상 등, 무지무지하게 자신을 사랑하고 아낍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로마서 1장 17절을 이해하고 기억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수십 가지 버전의 성경을 봐도 소용없습니다. 히브리어 헬라어 박사라도 소용 없습니다

. 더 심하게는, 겉으로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이 왜돌아가셔야만 했는지를 모르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죄를 고백하지만, 죄를 죄라고 말하는 솔직한 자기자신을 보며 의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죄를 인식할 수 있는 자신의 분별력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올바른 정체성과,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 가르쳐야 하는데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라고 말하며 쓸데없는 참견하기 바쁩니다.

인간본연의 존재적 불안감을 먹이삼아 생존합니다. 기독교 진리를 설파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철학에 불과합니다.

신앙은 이성으로 가능한 영역이 아니라는 지식이 있기에 그렇게 말을 하긴 하지만, 실제 자신의 신앙은 정확히 이성 그 자체입니다.

이러한 형태의 신앙은, 사실 집단으로 시체놀이하자는 것과 똑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마치 집이 폭파되어 길거리에 나앉은 사람들과 그 신세가 비슷합니다.

그 폭파된 집을 새 집으로 고쳐주시려고 주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셨는데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마 16:28)

그런 예수님께 대하여 “당신 혼자 독고다이로 아무 일도 할 수 없으십니다. 우리가 하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으며,

사람들을 향해서는 “집이 비록 폭파되었으나 그럭저럭 고치면 쓸만해질 것입니다.”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자유케 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뭔가를 잘해서, 혹은, 그럭저럭 괜찮은 철학적 소양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과 화목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마시고 살을 먹어야 화목해집니다.

우리가 그 분의 원수이지만 예수님이 정말 사랑하셨다는 것,

이 사랑이 오직 전부라는 그 진리를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이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복음이 진리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좋은 것입니다.


p.s 예수님께서 칼을 가진자는 다 칼로 망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마 26:52)

그렇게 말씀하실 때조차,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생각만 하셨습니다.(56절)

결국 성공적으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그런데, 베드로는 여전히 주님의 말을 못 알아듣습니다. 오히려 철없게 이런 말을 합니다.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요 21:21)


이처럼 철저하게 하나님 나라는 오직 주님의 공로 위에 세워집니다.

말도 안 되는 인간들을 데리고 말입니다.

이 원칙은 진실로 진실로 철저하게 지켜집니다.


요즘 교회를 보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철학으로 승부를 보는 자는 철학으로 망할 것이다.”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자신 때문에 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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