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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더불어 살아갈 말년(末年)

 

말씀과 더불어 살아갈 말년(末年)’의 전제(前提)하에 이 제목의 글을 쓰려고 하는 것이 필자의 본심(本心)입니다

 

1996년 이 철 목사가 취임한 후 사무장직을 퇴임하는데 퇴임하더라도 경조부 간사직 만은 더 계속해달라고 부탁을 받고 나는 매주 목요일 남자 소망회 성경공부 지도를 맡아하면서 초상이 날 대마다 종전대로 2008, 파킨슨병으로 쓰러질 때까지 경조사 간사 직은 그대로 계속했다..

 

초상이 나지 않는 한은 독서하고 창작할 자유시간이 생겼다. 문학의 꿈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1985년도 중반부터 교회월간잡지의 필요성이 생겨 여전도회에서 ,<옥합>월간지를 만들기 시작해서 나도 원고를 내 봤는데. 그 게 채택이 되어 실렸다. 초등학교 졸업 무렵부터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은 있어오던 차. 옥합지에 낸 글이 실리면서 문학에 대한 자신이 생겨서 독서와 신문은 필독을 했다. 섹스피어, 부활, 죄와 벌 등 고전소설과 최 인호, 이 광수, 염 상섭, 이 문렬, 등이 쓴 저서들을 거의 사 모아서 읽기 시작했다.

 

내 자신을 생각해보면 분명 글쓰기와 문학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내가 자라온 환경, 경제문제, 속아온 스폰서 문제를 생각하면 하나님께 투정 부려야 하고, 날마다 울어야 했다, 내 실력을 감지 못하고 실수를 많이 한 점을 생각할 때 글로써 인생이 업그레이드 될 확률은 전혀 없어보였다.

 

나는 대동아 전쟁당시 11세에 초등학교 2학년으로 입학한 후 15세에 어머니가 작고하신 후 고아가 되어 집도 없고 집안의 도움을 받을 형편도 전혀 없고, 유산 이라곤 땡전 한 푼도 없는 신세여서 5학년 때부터 교내에서 문방구 장사를 해서 월사금을 내고 졸업을 했다.,

 

이러구러 고학한다고 객지로 돌아다니다 본래 나를 신용해왔고 알고 지내던 신 흥식 장로를 서울에서 만났다. 나의 비전을 묻기에 목사가 되겠다고 했더니 자기 도소매상점(都小賣商店) 몇 년간만 맡아 주면 네가 목사 될 때까지 책임을 지고 공부 뒷바라지를 해 주마고 나의 의사를 묻기에 두 손 합장하고 수용했다. 그날부터 약 7년간 점원으로 일하며 4년간 짜깁기 식 공부를 하고 서울로 신학대학을 진학하여 입학했는데 막상 떠나려니 입학금만 대주고 그 후로는 너 자력으로 공부해라였다. 이만저만 약속 어김이 아닐 수 없었다.

 

취직 반년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가족 전체는 피난하고 그 많은 상품을 포장하여 깊은 산속에 보관했다가 수복이 된 후, 상점을 복귀시키는데 절대 공노자 역할을 했다. 내가 취직한 곳은 중소도시여서 야간중학이 없었다. 수복 후, 2년이 지나서 학교입학을 허락받았다. 주간학교를 다닐 수밖에 없는데 중학교 교과서 냄새도 맡아보지 못한 내가 나이가 많아 덜컥 중학교 3학년으로 편입하여 공부를 시작했다.

 

모처럼 시작한 학창생활은 어중간(於中間)인생의 출발이었다. 전통적으로 이어오는 5일시장(五日市場)날마다 학교는 결석을 하고 점원생활을 해야 했고, 주중 2일 정도는 상품구입 차 오후조퇴를 해야 했다. 때문에 등교해서 수강 중에도 10분간 쉬는 시간은 결석으로 수강하지 못한 것을 친구 노트를 빌려서 옮겨 적느라 운동장 한 번 볼 사이도 없는 것은 물론 친구와 이야기 한 마디 할 시간조차 없이 고3까지의 세월을 보냈다. 취직한 지 한 달 되던 날 월급봉투를 주기에 받지 않았다. 신 흥식 장로가 목사가 되도록 스폰서 역할을 하겠다는 약속을 더 굳히기 위해서였다. 꼭 필요한 용돈 외에 3개월마다 납부하는 중고등학교 납입금만 타다가 서무과에 지불했을 뿐이다. 4년 동안의 학교 공납금이 내수고비라고 치지만 2년 동안은 장기적인 대학과정을 생각하고 무보수로 일한 샘이었다.

 

번영상회는 워낙 신용 있는 상점으로 고객이 많아 학교에서 수강시간을 가질 뿐 중간고사 학기말고사 때마저도 시험 준비 시간을 전혀 가질 수 없고 평일도 하학(下學)후는 예습이나 복습할 시간을 전혀 가질 수 없었다. 나는 처음 약속할 때의 태도로 봐서 , 이분이 인재 양성의정신이 있는 분이구나라고 여겼는데 사회사업에 성공은 했어도 중학교 생활도 안 해본 분이어서 학생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 분이고, 나를 채용한 목적이 인재양성이 아니었구나라고 치부해버렸다. 그래서 내 공부는 짜깁기 식 공부였다고 말하는 것이다.

서울의 장노회신학대학(사당동 총신대학의 전신)에 입학이(1학년 마치고 대학생활 마감) 되어 약 7년 만에 그 집을 떠났다. 떠나기 전날 밤, 신 은정(신 흥식 장로의 딸)이 동료여고생을 시켜 자기를 S동생 삼게 해 달라고 심심당부를 했다며 그 동료들이 기어이 내 대답을 요구했으나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떠나는 날 아침에 신 은정으로부터 문학서적 두 권을 건네받았다. 그걸 열차에서 부터 다 읽어봤다. 한낱 문학차원에서 이해하고 그냥 넘겨버렸어야 할 일을 연정의 글로만 이해하고 그의 학교 기숙사로 그 책을 되돌려 보내버렸다. 아마도 사감에게 발견되어 굉장한 책망을 들은 모양이었다. 보내온 편지 내용이 굉장한 상처를 입고 쓴 편지였다. 그는 문학소녀였고 나는 학창시절 시간상 소설 한권도 읽어보지 못한 숙맥이었다. 너무 서툰 짓을 했기에 신 은정에게 사과할 기회를 노렸다.

 

대학생활 중에도 강의가 끝나자마자 남대문시장에 나가서 양말장사를 했다. 장사가 안 되는 시간은 신 은정에게 상처를 입힌 일이 마음에 걸려 고민이 되었다. 주관적인 내 장래를 포기하자. 입버릇이 되었다. 사랑을 하지 않으면서도 인연을 맺을 것처럼 사랑고백의 편지를 그에게 보냈다. 그의 대답의 편지는 나는 그 사랑을 감당 못 합니다. 어쩌려고 그런 생각까지 했습니까. 죽고만 싶습니다’. 라는 답장에 아직도 감정이 경직되었구나!. 긍정적인 답이 올 줄로 알았는데....영영 결별 로 간주하고 다른 아가씨와 약혼을 해버렸다. 그런데 웬 일인가 얼마 후에 그의 부모로부터 신 은정과 교제하도록 요청이 왔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조건이 안 좋았지만 하나님 앞에서 기도로 약혼을 해버렸는데 번의할 수가 없었다.

 

20년 전 문단에 등단 후 글을 쓰면서 신은 정이 나의 사랑고백에 부정적인 글을 보낸 것이 반어법(反語法)이란 것을 비로소 알고 무식한 소치에 후회를 하면서 금년 초에 신은정의 아들을 데리고 신 은정의 묘 앞에서 사과를 한 적이 있다.

 

1957년도에 창경궁에서 반공전람회가 열렸는데 관람 차 경복궁 입구에 입장하던 중에 내가 100만 번째 입장하므로 나는 그날의<행운아>라는 명명을 받아 방송이 되고, 청와대직원, 장성들, 내빈들이 그곳에 운집하였다. 기자들의 카메라 세례와 꽃다발이 가득한 가운데 육본 기자단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날의 감상문을 써다주기로 되어있었다. 감상문을 쓴 원고를 윤 영춘 국문학 교수에게 드리면서 교정을 부탁하고 왔다. 그 후 두 번이나 교수님을 찾아갔으나 원고가 맡겨놓은 그대로여서 그냥 회수하고 육본 제출을 단념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문장이 얼마나 엉터리였기에 아예 손도 안대는 것이 낮겠다 싶어 교정이든, 교열이든 윤문이든 간에 교수님도 포기한 것이 아니었을까 문단에 등단한 다음에야 내 글이 엉터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영재라고 해도 한 번은 들어서 기억창고에 간직되어야 자기 지식이 되는 것이지 나같이 짜깁기 공부하느라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것을 어떻게 문장을 만들어내랴.? 내 머리가 영재는 아니어도 중상(中上)의 수준은 된다. 그러나 워낙 배운 것이 적어서 교회일 외에는 매사에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다.

 

1945년에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여 지금까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려왔지 원망하거나 낙심하거나 신세 한탄해 본적 없다. 오로지 주님과 동행하게 해주신 그 은혜 측량할 길이 없다. 교회생활한 지 33년 후에 남서울교회로 이적하면서 신앙적 삶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남서울교회 목장에서 일하게 해주심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퇴임 후, 문단에 등단하면서 문학방면에서라도 내 인생이 대학졸업자 수준으로 업그레이드 되도록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인도하신 것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피천득 수필집을 좋아했다. 그리고 수필은 붓 가는대로 쓰는 것이라고 해서 수필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옛날의 고정관념이다. 1997년에 매주 목요일에 두 시간 하는 수필 강좌 학원에 등록하여 강의를 듣기도하며 품평회도 하는 수강생으로 2년을 마치고 한국에서 제일 권위 있는 月刊 隨筆文學에 등단했다. 그 회원 중에는 대학교수 퇴임자, 학교교장출신 등 대개 대학졸업자들이 많았다. 등단 후 행운아의 에피소드』 『상대 없는 꿈 이야기라는 수필집을 출간 했다. 문학단체에서 문학기행을 많이 하는데 그때마다 많은 소제를 만나게 되어 글감들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의당 매월 등단지에 작품도 내게 되고 타 수필문학계에서도 원고청탁이 들어와서 써주기 마련이었다. 그 당시 수필은 200자 원고지 15매 내외로 한정이 되어있다. 그 정도의 지면에다 자기의 사상이나 철학을 담아내기는 너무 지면이 적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래서 소설이 쓰고 싶었다. 서점에 가서 전상국 저당신도 소설을 쓸 수 있습니다와 송현오지음 한국 현대소설론을 주 학습용으로 구입했다. 그리고 참고서적으로 속담풀이사전』 『우리말 분류사전을 골라왔다.

 

그렇게 하여 소설쓰기공부를 6개월 동안 독학했다. 소설공부를 하다 보니 구성(構成)이 중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시점(視點)을 이해하는데도 어려웠다. 소설을 잘 쓰려면 장편보다 단편을 잘 써야 한다고 권한다. 단편의 길이를 200자 원고지 80~100매를 권장한다. 나는 강원대 전상국교수의 소설쓰기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선배들의 단편이나 소설론을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어 채득하며 우선 10편의 단편을 완성 하고 고급심사원으로부터 심사를 받고 싶었다. 대학생활을 많이 못해 문학계에 아는 교수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어느 시인친구에게 부탁하여 소개를 받은 분이 성균관대학 고 윤 병로 교수였다.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엠버서더호텔부근에 있는 그의 연구실을 찾아가서 교수님, 이 단편 두 가지를 읽어보시고 제가 소설을 쓸 수 있는지 없는지 그 부분만 솔직하게 말씀해주십시오. 소설공부로 더 시간 소비를 안 하고 싶어서 입니다.” 라고 부언했다. 그것은 정말이었다. 그 심사에서 낙오되면 그만 둘 작정이었다. 맡겨놓은 지 10일정도 되어 사무실로 불러서 갔더니 울먹이네와 프린세스라는 풍자소설을 지적하면서 이정도면 소설을 쓸 수 있겠기에 구 인환 교수(서울대)와 의논하여 이 작품을 순수문학으로 추천을 해 주겠소 단 눈 크기의 단어를 ,<왕방울>로 고쳐오시오라고 말했다. 단번에 심사통과가 되다니! 너무 기뻤다. 그 단편의 주제는 <생명존중>으로 애완견을 등장시켜 케릭터 들을 묘사했다. 그리고 어느 날, 구 인환 교수와 윤 병로 교수를 모시고 명동의 한식집을 찾아 식사 대접을 한 적이 있다. 그 소설을 한국 소설가협회에까지 구 인환 교수가 추천하여 나는 한국소설가 협회 회원이 되었다.

 

저서로는 수필집, 소설집, 장편소설, 칼럼집, 논픽션, 8권밖에 출판을 못했고, 단편들은 여러 문학지에 실었다.

풋내기 문학인이었지만 경기도 문학상과 김소운 문학상을 받은 바 있다. 청계천 별곡을 출판한 후, 한국문인협회 성남지부에서 소설부문 심사원으로 위촉을 부탁해왔지만 건강상 사양했다. 창작생활 중 특별한 일은 한국교회에 긴급제언합니다라는 책을 어느 목사님에게 보내면서 읽어보시고 교인들에게 장려할만한 책이면 거저 드리겠습니다.” 라고 했더니 나머지 300권을 저자가 20% 감해주는 것도 사양하고 책값을 다 보내 왔다.는 사실이다.

 

얼마동안을 이 세상에 살아있을 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터전에서 아날로그 문학의 보존과 디지털문학을 연구해가며 살고 싶다. 뿐만 아니라 가방끈이 너무 짧은 자의 말년도 4차원세계의 문학도가 되기를 소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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