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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오빠 여군동생(육군/義男妹)

 

고 신 흥식 장로님은 딸이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어느 날은 서울에서 오르간을 한대 사왔다. 그러나 신은정은 그 오르간연습에 별로 관심이 없어보였다. 나는 주일 날 오후는 약간의 시간이 있어 건반 위에 손 얹기를 좋아했다. 오르간 앞에 앉으면 하나님 저도 이 오르간을 치면서 봉사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그렇게 해서 영광 받으십시오.”라고 꼭 기도를 하고 연습을 했다. 아직 계명(階名)도 외우지 못하면서 오르간교본만을 열심히 쳤다. 누구로부터 지도받을 형편도 못 되면서 우선 내가 지금까지 불러왔던 찬송가부터 쳐보기 시작했다. 오르간교본을 마스타하고, 찬송가 전 곡을 반주해보기 시작했다. 2,3년 오르간을 만지다 보니까 찬송가 정도는 거의 4부로 칠 수가 있었다. 정식코스를 밟아 공부한 음악도에 비하면 앵무새법의 반주이지만 말이다.

 

해병, 하면 사병65, 군번: 9258484, 훈련소의 편대는 11중대, 이 모든 것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내 인생의 훈장이다. 훈련이 시작된 지 5일정도인데 입체영화를 한다면서 모두 병사 떠나, 벼락치기 훈령이 방송되자 그 많은 신병이 대열을 맞춰 섰다. 그런데 전북에서 우리 서울장정들과 같이 입대한 훈련생이 도망 중 채포되어 그 자리에 섰다는 것이다. 10개 중대장이 돌아가며 10대씩의 빳따를 도망병 궁둥이에 쳐대는데 맞던 중 쓰러지면 냉수를 부어 다시 일으켜 나머지를 쳐댔다. 나도 어느 하사관이 엉터리 말을 너무 하기에 그 말을 교정해주었다가 건방지다고 해서 빳따를 마저 본 적이 있지만 그 당시는 사회교육을 받은 교관들을 입대시킬 게기가 안 되어 하사관(교관)들이 우선 군사훈련만 받았기에 무식할 수밖에 없어 훈련병들은 야만적 훈련을 감내하느라 죽을 뻔 했다. 첫도망자로 붙잡혀 100대의 시범빳다를 맞은 사병은 궁둥이가 썩어 문드러졌다는 말을 나중에야 알게 됐다. 그 다음에 붙잡힌 도망병들은 열대 이내의 체형에 불과했다. 그런 식 규율이 그 당시 훈련소의 패턴이었다.

. 훈련 2개월쯤이었을까 연병장에서 시험을 치르는데 중학교 1,2학년 교재는 전혀 냄새도 맡지 못한 채 중 3으로 월반하여 첫 시간에 배워서인지 인상깊었던 삼각함수문제가 출제되었다. 정답을 썼더니 그게 내가 포병(砲兵)의 병과를 갖게 된 게기였다. 훈련이 다 마쳐갈 무렵, 상남이란 곳은 어느 기수(期數)이건 꼭 한번 거치는 곳이었다. 산 속 민가에서 하얀 쌀에 감자를 섞어 지어주었던 그 점심은 생전에 못 잊을 것 같다. 그만치 훈련소에서 배고픔을 겪었다는 이야기다. 나는 면회 한 번 받아본 적이 없었다. 모든 훈련병들은 매 토요일마다 면회실에 불려나가 가족들이 주는 맛과 배부름을 만끽하고 왔으나 내게는 그런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배고프다고 껄떡거리는 짓을 할 줄 몰랐다. 다만 훈련소에서 사단으로 마지막 떠나는 날, 맨 끝에 있는 밥 한 그릇을 먹어 치워버렸는데 한 병사가 아침밥을 못 먹었다고 하잖은가. 그게 내게는 평생의 죄짐이 되어버렸다.

65기 사병들은 거의 서부전선을 방위하는 1사단에 배치를 받아 소속부대로 옮겨가던 중 1차로 거친 곳이 11연대 연병장이었다. 그곳에 하차한 신병들에게 다시 한 번 신상명세서를 쓰게 하는 데 거기에 취미나 특기의 기록 난이 있었다. 자신이 없으면서도 특기 난에 반주라고 적어서 제출했다. 다시 군용차를 타고 포병중대본부가 주둔한 전방으로 더 가야한다. 고했다. 승차를 재촉하는데 정말 가기 싫었다. 아예 손으로 시야를 가리고 현지까지 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 중대본부가 금촌읍 월룡면이 아닌었나 싶다. 야전교육을 받고 잠을 자고 나딩굴어야 할 내 집이 토굴이었다. 아마도 사병 중에서 내가 나이가 제일 많았을 것이다. 흔히 오뉴월 하루 빛이 어딘데라며 기수를 철벽처럼 따지는 그 내무반에서 제일 고령자인데도 66기 신병이 올 때까지 내가 식사 당번을 맡아야 했다. 평소에 새벽마다 정규 새벽기도를 해왔는데 그 생활을 못하게 되어 고민이었다. 내 분대원들의 밥을 담아올 식통을 들고 방갈로와 좀 떨어진 숲 속에 들어가 군종실로 인사발령을 내주시라고 매일 10여분 씩 기도를 하고 나서 중대본부 식당에 가서 분대원의 식사 분을 타가지고 와 배식을 하곤 했다. 그렇게 한지 15일 만에 11연대본부에서 연대본부교회 나를 반주자로 인사발령을 결정하고 그 공문을 중대본부에 내려 보냈다.

 

가슴 깊은 곳에서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어찌 그리도 제 기도를 들어주셨습니까! 감사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육군과 달라 해병은 군종병과가 없어 보병 병과라야 갈 수 있는 곳인데 내가 가게 되었다는 말에 다른 사병들이 부러워하며 축하를 해주었다. 그러기에 포병이면서도 포 한 번 만져보지도 못한 것이 애석해서 제대 3개월을 앞두고 자진해서 광주 포병학교에 가서 포병 위탁교육을 마치고 예편했다.

 

군종실로 가보니 군목과 사병 3명뿐이어서 인격 무시할 사람도 없고, 분위기 가 조용해서 좋았다. 주일예배 시 반주와 군목이 없을 때 대리설교, 유년주일학교 운영 등 익숙한 일만 하다가 제대를 할 수 있었다. 여고생이나 금촌읍에서 믿는 아가씨들이 찾아와 심심찮게 해줬다. 부서의 규모가 작다보니 CPX, FDX 등 가상전투훈련을 한 번도 참가하지 않고 제대하고 보니 군종생활 이외는 거의 생각나는 게 없다. 이러고도 대한민국 남자구실을 했다고 하기엔 낯이 뜨거웠다 대신 신앙적 영역을 맡아왔다는 점에서 위안이 되었다.

 

군종실로 편재가 된 후, 마음도 안정이 되어 행운아를 축하해주고 훈련 시 위로와 힘이 되어 주었던 지 영숙 여군을 만날 준비를 했다. 19584월쯤이 아닌가 싶다. 마음이 들떠있었다. 사지 정복을 칼날처럼 다리미질해서 착용하고 해병의 모자에 상징적 매력인 빨간 명찰을 붙이고 보니 내가 봐도 그럴 듯해 보였다. 금촌읍에서 서울로 달리는 버스는 평소보다 느린 느낌이었다. 드디어 삼각지 육본(陸本)앞에 도착하여 위병소에 여군 면회신청서를 접수 시키자 생각지 않은 해병이 더군다나 여군면회신청을 하다니 위병소 병사들이 반가운 듯 이상야릇한 듯 나를 몇 번이고 탐색해봤다. 그 당시 까지만 해도 해병을 개병대라고 했다. 열차에서나 버스에서나 위탁교육을 받으면서도 늘 육군을 휘여 잡는 추세였고, 육군은 슬슬 피해버리는 추세였다.

 

나는 그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그의 몸매와 얼굴이 동양형일까 서양형일까. 궁금했다. 육본 정문에서 본관까지 상당히 멀어 보이는데 심겨진 잔디가 너무 생기가 있어 그린 카폐트 같았다. 드디어 두 여군이 나오기에 아직도 기대감이 꿈틀거렸다. 지 영숙은 창경궁에서 나를 봤지만 나는 초면이 아닌가. 그런데 두 명의 부사관이 내 앞에 서더니 여기는 같이 근무하는 친구에요라며 자기는 무언의 목례로 당사자임을 눈치 채라는 것이다. 위병소 병사는 물론 지나가는 육군들도 한번 씩은 우리들을 눈여겨보고 스쳐갔다

 

외출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지 영숙이 동료에게 시선을 돌려 의사타진을 하는것 같았다. 그 동료 군인이 갈수 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택시를 잡아탄 우리가 남산으로 가자고 기사에게 말하자 남영동 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남산에 오른 기사는 즐거운 만남이 되십시오’. 라며 미끄러져 내려갔다. 나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만약 지 영숙이 혼자 나왔으면 감정소통의 시간이 걸릴 텐데 그의 친구와 같이 나왔다는 점과 이성과의 첫 만남에 지혜스럽게 동료와 같이 동행했다는 점에 속으로 칭찬했다. 우리는 먼저 남산의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많이 했다. ,,3군 장병들이 많이도 지나가는 데 한 번씩 꼭 뒤돌아보고 부러운 듯한 눈치를 보였다.

 

일행은 이대통령 동상 앞에서 정중하게 목례를 표했다. 시야에 펼쳐진 서울 도심을 견학하고 특별히 청와대를 역사를 탐지하듯 유래를 이야기 하며 외양도 일일히 지적해봤다. “이 계단이 몇 계단인줄 아세요?” “우리야 모르지요” “480개랍니다. 나는 매일 이 계단을 오르고 내립니다. 공부하는 곳이 저 건물이니까요. 일본사람 신사당이었는데 저 건물을 우리 학교에서 접수하여 임시로 쓰고 있답니다라고 가르쳐 주었다. ”오 선생님, 어서 신학 졸업하여 훌륭한 목사님이 되시기 바랍니다지 영숙이 한 말이다. 우리는 시야를 넓혀 서울 이야기와 함께 군대생화의 특수성과 육군과 해병의 개괄적인 이야기를 주고 벋으며 서울의 공기를 다 마시다 싶이 했다. 내가 남대문 쪽으로 유도하여 내려가던 중 좁은 골목에 금호사진관이 있었다. ”우리 기념사진 찍읍시다라고 권하자 순수히 사진관으로 따라 들어왔다. 사진사가 눈치 빠르게 세 사람의 자세를 잡아주더니 자- 찍습니다. 찰칵, 셔터가 터졌다. 며칠 후에 내게 온 사진을 각각 보내주었다. 좀 더 내려가니 금호여관이 나왔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신 장로님 아직 안 오셨는데요.” 라고 말하기에 아니요 오늘은 이 친구들과 같이 쉬여가려고요

했더니 온화한 방 하나를 내준다. 세 사람은 그 방에서 한 요 밑에 발을 뻗고 사심 없고 예의 넘치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리고 저녁을 그 곳에서 같이 하고, 나는 금촌, 그들은 여군부대로 돌아갔다.

 

그 후부터는 지 영숙과 나 사이에서만 편지 왕래가 계속되었다 그는 필체가 힘이 있고 글 솜씨가 좋았다. 여군이란 신분 때문에 외출은 잘 할 수가 없고, 나 역시 주머니가 엷으니 영숙을 자주 만나자고 할 수가 없었다. 그저 편지만 몇 번 했어도 정이 들어 지 영숙은 나를 오빠로 부르게 해 달라고 해서 우리는 에로티시슴(Eroticism)이 아닌 에로스(Erose)의 의(義男妹)가 되었다 그 인연을 순수하게 지켜나갈 자신을 가졌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노년에 그 생각에 젖어 고통을 느껴야만 하나. 나는 죄 값을 받고 있음이 틀림없다. 내가 소년 시절에 여군사병에 대해서 폄훼를 해서 그 것이 잠재의식화되었는 지는 무르겠으나 그 당시 지 영숙에 대해선 곱게만 생각했고, 앞으로 자주만나야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해병 1사단이 포항으로 이동하면서 내가 절교 하자는 말 한마디 한 적도 없고 절교할 이유가 전혀 없었는데 그만 마지막 이별의 절차도 없이 시베리아 공간을 만든 후 60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아무 소식을 주지 못했다. 그 당시 그는 신광여고 야간부 2학년을 재학하면서 육본 인사과에서 근무했다. 그런 지 영숙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는 죄책감에 날마다 시달리고 나는 불면증 환자가 되었다. 작년에는 행운아였던 해병이 여군폄하를 사과합니다.라는 논픽션을 출간하였고 KBS 아침마당 프로에 출연하여 애절한 사연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신문고로부터 행정안전부에까지 주소지를 알려달라고 신청했으나 허사였다. 나는 그와 연애를 한 것도 아니고, 순수한 남매지간의 결연자로서 사죄를 하기 위해 만나려고 하나 법이 허용을 안 해 주니 가슴이 타고 있었다. 조선일보의 독자투고 란에 사진과 함께 한 번 실어달라고 부탁했으나 그 역시 채택을 기각당하고 말았다. 나는 영원히 지 영숙에게 죄인이 된 상태에서 무덤에 가야 할 것 같다. 35년간 구독한 조선일보도 925일 부로 배달중지를 통고했다. 조선일보 서평촌 지국에

 

나는 죽기 전에 지 영숙 여사를 꼭 만나고 싶다. 순수한 동생으로서 사랑함을 한 번 꼭 보여주고 싶다. 창경궁의 추억과 남산의 추억 뿐 아니라 서툴렀던 나의 처세술로 인하여 상처를 입었던 그의 입으로 오빠, 나 이제 60년 전의 쓰라린 감정이 완화 되었어요남매간의 부드러운 손결의 온도를 감지하며 여행을 같이 가고 싶어요라는 그의 음성과 시선을 듣고, 보고 싶다.

 

금촌에서 군생활하는 동안 또 한 가지 잊을 수없는 미담이야기가 있다. 북한에서 월남하여 순천 지역에서 3,4년 목회를 하셨던 고 김덕수 목사님이 계셨다. 그 때 나는 청소년으로 그 목사님 내외분을 만나면 인사정도 할 정도였는데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처음 도원동 기숙사에 기숙하면서 도원동에서 가까운 마포구 동막교회를 몇 번 드나들게 되면서 목사님 내외분과 아주 친숙해졌다. 그분들과의 교제는 군에 입대한 후에도 이어지게 되었다. 군생활 중 나는 외출해서 찾아갈 곳도, 휴가중에도 특별히 찾아갈 곳이 없어 동막교회 김 덕수 목사님 집을 자주 방문했고 김 목사님 내외분도 흔연스럽게 늘 대해주었다.

 

1950년대 말, 고 김 덕수목사가 시무하는 동막교회도 흔히 볼 수 있는 교회처럼 규모가 조그마한 교회였다. 역시 사례금도 빈약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런 형편의 교회를 속없이 찾아다니며 궁색한 교역자 살림의 부담을 시키지 않았나 싶다. 김 목사의 사모님은 애교 있고, 교양이 넘칠 뿐 아니라 친절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사모님의 정에 끌리었다. 그렇더라도 가난한 교역자 집에 자주 방문하는 것은 자제해야 했는데 그렇지를 못한 것이 나의 어리석음이었다. 사모님은 늘 나를 동생처럼 대해주었다. 나는 가난 중에 자라 경제관념이 없고, 부모형제 없어 사랑에 굶주린 탓이었을까. 사모님이 그렇게 좋았다. 어느 날, 목사님과 사모님과 나 3인이 겸상하여 점심을 같이 하는 기회가 있었다. 주로 사모님이 이야기의 리드를 하는 편이었는데 식사 중에 사모님께서 여보, 우리 오 선생을 동생 삼읍시다라고 제안하자 평소에 설교도 무거운 톤으로만 하시던 목사님이 쉽게 그럽시다라고 동의할 목사님이 아니었다. 묵묵부답이었다. 식사 후, 사모님과 나는 동네 사진관을 찾아 남매처럼 포즈를 잡고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이 누나와 동생의 결연사진인 것이다.

 

제대후, 나는 지방으로 갔다가 얼마 안 되어 서울생활로 바뀌였지만 목사님의 딸 결혼식 때 한 번 참석한 후에는 더 찾아가보지를 못했고 더구나 그 목사님은 통합측 교단이었고 나는 합동측 교단이어서 만날 기회가 더 멀어졌다. 아무리 생활이 어렵고 교단이 다르더라도 나는 사람노릇 못하고 살았다고 후회를 많이 했다. 김 덕수 목사님께서 고인이 되었다는 소식은 알고 있었지만 누나인 사모님의 소식이 궁금했다. 그 누나를 만나면 여비도 드리고 용돈도 드리면서 손잡고 추억을 더듬어보고 싶어 백방으로 탐문하다가 통합즉 총회사무실에까지 찾아가서 몇 십 년 동안 이동했던 교회를 추적하여 구로구의 어느 교회 어느 장로님을 전화로 만나 겨우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그 사모님마저 고인이 되었다고 하잖은가. 나도 노인이 되어서야 철이 든듯 울고 싶었다. 그렇게 정들게 대해주셨던 사모님, 아니 누나, 너무 그립습니다. 은혜도 모르고 안테나 없이 살아온 동생을 천국에서라도 용서해 줄 수 있습니까. 남매의 상징으로 촬영해 간직했던 흑백사진을 매만지며 울고울어 눈물만 고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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